[교복을 벗고 세상을 입다] 일탈과 일상의 사이에서
처음 나폴리에 도착하던 날, 나는 졸음에 잔뜩 취해있었다. ‘나는 비행기에서 한숨도 못 자는 사람’이라는 엄청난 사실을 깨달은 날이었기 때문이다. 비행 중 푹 자겠다는 일념으로 전날 힘겹게 밤을 지새웠건만, 하늘 위에서는 죽어도 잠이 오지 않았다. 결국 36시간 넘게 눈도 붙이지 못한 채 지구 반대편에 도착했다.
뻑뻑한 눈을 두 손으로 비비며 공항 밖으로 나와,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탔다. 날씨 하나만큼은 놀랍도록 좋았다. 나폴리의 햇살은 선글라스 없이는 버티기 힘들 정도로 강렬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바다와 햇살이 만나 자아내는 아름다운 윤슬조차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예약한 숙소는 바닷가에 있는 아주 작은 호텔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공항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한국에서 왔다는 말을 듣자, 호텔 주인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는 자신이 몇 년 전 한국에 간 적 있으며, 심지어 외국인 역할로 한국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는 의외의 이력을 밝혔다. 안타깝게도 내가 본 적 없는 영화였지만, 그는 오랜만에 한국을 떠올리게 된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은 듯했다.
객실 곳곳을 친절히 안내해 준 호텔 주인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문을 닫자마자 잠이 쏟아졌다. 밤을 지새운 업보가 한 번에 밀려들고 있었다. 당장 침대로 뛰어들고 싶었지만, 내게는 ‘씻지 않으면 침대에 올라가지 않는다’는 철칙이 있었다. 나는 융통성 없는 나 자신을 원망하면서 욕조에 몸부터 담갔다.
36시간의 피로를 따뜻한 물에 녹이고 나자, 지금 당장 잠들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할 수 있었다. 딱 1시간만 눈을 붙이면 좋겠다. 어쩌면 2시간 정도. 아직 점심쯤이니, 늦어도 오후에는 나가서 동네를 조금 둘러볼 참이었다.
내가 다시 눈을 뜬 건 저녁 8시 무렵이었다. 찬란한 햇빛도 반짝이는 윤슬도 사라지고 어둠이 골목 사이사이를 채우고 있었다. 3주도 채 되지 않는 시간을 지구 반대편에서 보내기 위해 그간 얼마나 많은 일을 몰아서 해치워야 했는가. 힘겹게 쟁취해 낸 여행의 첫날을 이렇게 보내버리다니 믿을 수 없었다. 늘어지게 자는 건 집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인데 말이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나는 얇은 코트를 둘러 입고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나에게 남은 건 첫날의 거창한 계획도 활발하게 움직이는 도시의 풍경도 아닌, 나폴리에 오면 응당 피자를 먹어야 한다는 고리타분한 생각뿐이었다. 하루 동안 한 것이라고는 비행기에 타서 지구 반대편으로 실려 온 뒤 잠을 잔 것뿐인데, 엄청나게 배가 고팠다.
이것저것 잴 것 없이 숙소 근처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이 동네에 있는 웬만한 식당은 다 피자를 파는 것 같았다. 주린 배를 붙들고 메뉴판 가장 위에 있는 피자를 시켰다. 비록 지금까지는 계획대로 되는 게 없었어도 이제부터는 모든 게 괜찮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그러나 내가 예상치 못한 두 번째 난관이 있었다. 지금까지 내가 먹었던 피자는 토핑이 가득해서 두 손으로 받쳐 먹어야만 하는, 도톰하고 치즈가 가득한 음식이었는데. 눈앞에 놓인 것은 토마토와 치즈 몇 조각만이 올라간, 약간 말라비틀어진 듯 노릇하게 구워진 밀가루 전이었다. 낯선 첫인상이었다.
이후에도 수난은 계속되었다. 하루 종일 잠만 잤던 첫날은 아주 화창했는데, 본격적으로 여행을 해보겠다고 마음먹은 둘째 날에는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오랜 비행이 피곤했던 건지 감기몸살에 걸렸다. 설상가상으로 식사를 위해 챙겨둔 20유로짜리 지폐를 잃어버렸고 우천 탓에 페리 운행이 멈추는 바람에 계획해 두었던 일정도 물거품이 됐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폴리는 내게 아주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일어난 탓에 지도도 보지 못한 채 서둘러 뛰어 들어갔던 시내 뒷골목에서 아름다운 가게들을 잔뜩 마주쳤다. 빈약한 토핑의 얇디얇은 화덕피자는 끝내주게 맛있었다. 으슬으슬한 몸을 이끌고 들어간 나폴리의 약국에서 추천받은 감기약은 놀라울 정도로 효과가 좋았다.
비록 비가 와서 페리를 타지는 못했지만, 그 덕에 시간이 남아 이름 모를 마을 곳곳을 자세히 둘러볼 수 있었다. 관광지에서 제법 멀리 걸어가자, 좁디좁은 나폴리의 골목이 드러났다. 그곳에서 빨래를 널어두고 창문을 연 채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해산물을 잔뜩 늘어놓은 생선가게의 매대와 그 옆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당연한 사실이 다시금 와닿았다. 나에겐 지구 반대편의 일탈이지만, 어쩌면 이들의 일상에 잠시 들어온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
만약 모든 게 계획대로 흘러갔다면 어땠을까. 너무 좁아서 햇빛이 잘 들지 않는 골목길도, 나를 화덕피자 마니아로 만든 그 레스토랑도, 길가에서 축구하는 아이들도 마주치지 못했을 것이다. 지구 반대편의 일탈을 꿈꾸며 여행 계획을 세우는 데만 며칠을 지새웠던 나는, 그곳에 도착해서야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누군가의 일상에 잠시 들어갔다 오는 것만큼 훌륭한 일탈은 없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