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 길을 걷네. 7] 다시 종로구, 이삿짐 내려놓고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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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바로크

 
다시 종로구로 왔다. 
 
2022년 3월 1일부터 2023년 4월 말까지 지난 14개월은 북한산 자락에 엎드려 어두운 처마 밑에서 가로등을 바라보는 시간이 차라리 좋았다. 처마 밑에 샤시창을 달거나 끊어진 전기를 이어서 전구에 불을 켜고 싶었지만 그냥 살았다. 어둠에 묻혀 앞으로 걸어야할 길을 생각하며 나의 팔다리를 흐르는 핏줄을 쓰다듬는 시간이 필요했다.
 
멀리 백운대와 원효봉 의상봉을 바라보며 아이들을 생각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봄기운이 다가오자, 겨울을 견뎌낸 나무에 잎이 돋아나고 꽃이 피고 나는 채소를 심었다. 집뒤의 야산에 있는 작은 절에 올라가 산신각을 돌아서 우람한 산봉우리와 능선을 바라보다 내려왔다.
 
봄기운이 더 밀려오면 씨앗 속의 채소가 자라고 잡초도 올라왔다. 작년에 내가 심은 채소는 상추 두 종류, 치커리, 공심채, 오이, 케일, 샐러리였다. 잡초는 맹렬했다. 그것들이 해로운 생명이 아니라, 단지 식탁에 오를 채소로 인정받지 못한 것일 뿐인데, 게다가 너무 열심을 내어 사는 것이 내 마음을 슬프게 했다. 인간에게 선택받지 못한 내력을 가진 것들은 내가 심은 씨앗보다, 건강하고 악착같이 번식을 했다. 악조건에서도 꿋꿋이 버티며 살아가는 사람들 같았다.

채소밭에서는 그걸 뽑아야했다. 단단히 내린 뿌리를 흔들어 뽑아내야 하니, 무릎도 아팠지만 마음이 힘들었다. 잡초가 땅속의 미네랄 성분을 땅 위로 끌어올려 작물이 더 잘 자라게 해주는 효과도 있다고 하는데, 정말 잡초를 제거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하지만 수북이 자란 잡초 사이로 작물들이 파묻히는 모습은 볼 수가 없고…
 
어쨌든 봄의 땅기운에 밀려 채소도 잡초도 잘 자랐다. 나는 여기저기 집안에서 저절로 나오는 산나물과 채소들을 뜯어다 비빔밥과 나물을 해 먹느라 분주하고도 즐거웠다. 물을 주어야 했고 잡초는 더 자랐다. 마침 서서 하는 잡초제거기를 추천받아 구입을 했다. 뿌리는 뽑지 않고 설렁설렁 긁어내니까 몸도 마음도 힘이 덜 들었다.
 
여름이 되자 이상기후에 한반도의 날씨도 요동쳤고, 집은 허술했다. 처음엔 그 허술함이 좋았지만 그 허술함의 결과를 내 몸으로 받아내야했다. 친구가 에어컨을 보내서 더위를 피하니, 벌레들이 방안을 노리고, 폭우에는 빗물도 샜다. 비명을 지르며 간신히 여름을 넘기고, 가을이 왔다.
 

 
대문 앞에 루꼴라를 심고 집안에는 겨울에 먹을 무만 심었다. 하늘은 높고 풀들도 주춤하니 가을은 점잖아서 좋구나. 처마 밑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어둠에 몸을 맡기며 지붕 위로 솟아오른 봉우리와 눈을 맞추었다. 삽상한 공기가 내 몸을 들락날락! 나는 이 바람의 통로이며, 아직 살아 고민과 생각의 끈을 붙잡고 있구나.
 
기온이 아래로 떨어지고 서리가 내릴 무렵, 텃밭의 무를 뽑아 무김치를 담고, 삼잎국화 어린잎을 데쳐서 냉동실에 넣었다. 겨울 대비용 작은 난로도 하나 구입해 두었다. 산밑은 서울보다 정확하게 3도가 더 낮았다. 나는 실내에서도 옷을 두둑히 입었다. 혈액순환이 느리고 추위를 많이 타는 나는 작은 난로를 켜서 등뒤에 두었다가 의자 아래 발을 쬐다가 하면서 석유보일러 기름을 아꼈다.
 
산속의 겨울은 내게 추위에 대한 내성, 원시적 생존력을 다그쳐 물어 왔다. 그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옛사람들의 계절 감각, 겨우살이의 어려움 생각해본다. 문밖의 찬 바람 속에서 어둠을 바라보거나 아득히 높은 곳을 지나가는 구름을 보는 일, 달빛을 받아보노라면 손발이 시려왔다. 문안으로 들어오면 벽돌 한 장의 사이가 세상과 나의 사이인 것만 같다. 온기가 퍼져있는 벽돌 안쪽 공간이 새삼 고마웠다. 전기포트에 팔팔 끓인 뜨거운 물 한 잔을 가지고 방 안의 책상 앞에 앉는다.
 
산밑의 긴 겨울은 짱짱한 추위에 온몸이 뻣뻣했지만 늘어지는 습관도 조여져 나쁘지 않았다.입춘이 지나자 산밑의 사람들은 서서히 봄을 생각한다. 우수와 경칩을 지나자, 밭에 거름을 붓고 부숙할 준비를 한다. 텃밭 가꾸기의 일정이 새로 시작된다. 나도 종묘상에 들러 상추와 쑥갓 오이 공심채 씨앗을 샀다. 일년 사이 부쩍 몸이 힘들어져 담 밑에 저절로 올라오는 취나물, 삼잎국화, 당귀 등 산나물을 기다리며 채소밭은 조금 줄이기로 했다.
 
옛날 어른들이 자식들 키울 때, 어서들 자라서 너희들 갈길을 가거라, 혼자 한갓지게 살고 싶다 하신 것처럼, 작년에 정신없이 하던 텃밭일이 이젠 힘들게 느껴진다. 늦봄부터 여름까지 물주고 풀 매고, 날씨 걱정하던 날은 얼마나 많았나. 벌레 걱정 더위 걱정도 이어졌다. 혼자 먹는 채소의 양은 빤하다. 데치면 한줌에 불과한 채소를 위해 날씨 살피고 고랑의 채소를 살피고, 잔손이 많이 필요하다. 작년에는 채소밭이 내 차지가 되어 얼마나 뿌듯하고 행복했던가? 그런데 1년 해 보니 행복 뒤에 들어가는 몸의 수고를 알게된 것이다.
 
마침 아이의 재취업 소식이 들려왔고, 나도 ‘어쩌다 농부’가 된 어려움을 고백하면서도 이곳에 사는 한 흙을 일구어야 하니까 친구 불러서 밭흙을 일구고 들어온 저녁,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화가 윤희였다. 제주도로 작업실을 옮기게 되었으니, 수장고가 있는 자기 집으로 거처를 옮겨오는 건 어떻겠느냐는 것이다. 어, 정말이야?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제안을 접수했다.
 
나야 뭐, 채소밭에서 죽겠다는 서원을 한 것도 아니고, 늘 도심 속으로 오가며 사는 작은 방랑자이니, 다시 옮기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며, 누구의 허락을 받겠는가? 나 편할 대로 하자. 혼잣말로 결정을 내렸다. 방을 내놓고, 일 년만에 또 한번 살림을 뒤집어 이사를 했다. 그토록 좋아했던 방문 밖의 북한산 봉우리들을 못본다고 생각하니 그게 아쉬웠고 미안했다. 한달여 시간 동안 서서히 마음을 달랬다. ‘저 산 뒤로 옮기는 것이다.’
 
북악산 서북쪽 자락이자 백사실 계곡 아래 부암동으로 이사를 왔다.
 
그리던 인왕산 기차바위가 맞은편에 있구나, 인간이 서식지를 옮기는 문제는 간단치 않은 일이지만 독거노인의 단촐함으로 북한산 밑에서 1년 살기를 마무리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올 수가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목탄드로잉 퍼포먼스로 생태주의 작가의 길을 연 허윤희, 그녀와 나는 녹색평론 일리치모임에서 만나 예술가의 DNA를 공유하고, 사는 일의 어려움과 놀라움을 각자의 작업 안에 녹이고자 했다.
 
윤희네 부암동 집은 위치가 좋아서 아는 사람들이 윤희가 집을 비우면 자기가 살고 싶다고 줄서 있던 곳이었다. 방 두 칸짜리 집에 수장고 한 칸을 확보하고 나면 혼자 사는 사람이 쓰기에 제격이다. 게다가 윤희가 서울 올 때 들려서 먹고 자고 할 수 있는 친한 사람이어야만 했으니 그게 바로 나였다. 산이 좋아 외곽의 북한산 아래 농가주택으로 갔다가, 일 년만에 다시 북악산 아래 종로구로 옮겨왔다. 우정의 이사, 친구 덕에 부암동이다.
 
도시 안에서 집을 옮긴다면 아주 계획적인 과정을 거쳐 예상 가능한 집의 규모와 시기, 방향이 결정된다. 그 동력은 경제적 여건이다. 그런데 이번에 감행한 나의 이사는 우정과 우연으로 그 시기와 방향이 갑자기 결정되었다. 유쾌하기도 하고 좀 얼떨떨하기도 하다. 동네가 풍광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뒤따라 매일의 생활의 방식도 바뀌어야 했다.
 

 
북한산의 서쪽 외곽의 평지에서, 북악의 언덕 위로 올라앉은 집이라서 모든 것을 배달에 의존해야 한다. 어느새 사람들은 이제 생필품 구입과 배달을 인터넷으로 해결한다. 이 동네는 비탈진 골목에 인구도 적은 편이라 구멍가게도 없고 채소트럭도 오지 않는다.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나도 이제 주문하고 배달받는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자의반 타의반으로 21세기 인터넷쇼핑을 받아들이게 될 것 같다.
 
인간은 약하고도 유연한 적응의 동물이다. 주변 환경이 바뀌고 생활방식이 바뀌면 그 영혼의 감응도 달라지며, 하루의 일과와 계절의 리듬도 새롭게 바뀐다. 몇 년 전만 해도 재래식 화장실에 대한 불편함을 잘 몰랐지만, 이제는 거기서 벗어났고, 손에 장바구니를 들고 다니며 집으로 무언가를 들고 오던 습관은 경사가 급한 언덕길에 부딪혀 한 달 이내에 그만두게 될 것이다. 어쩌면 내 안에 남아있던 야생의 본능이 서서히 잦아들고, 기술과 자본의 거미줄의 말단부에 플러그를 꽂고 현대인의 일상을 살게 될 것이다.
 
우리를 나가서 상처 입은 동물이 동물원에 찾아든 것처럼, 버티다가 병원에 입원한 지병환자처럼 이번 이사를 통해서 나만의 느린 생활방식을 남들과 같은 방식으로 갈아타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아쉽고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조금더 편리하게 몸을 덜 쓸테니, 책을 더 읽고 산에 더 자주 가자. 쳐다보던 북한산 대신 북악을 걷고 인왕에서 놀자 다짐을 하는데….
 
좋아하던 동네를 ‘우리 동네’로 사귀기 위해서 동네 산책을 나갔다. 창의문 언덕 위에서 에스프레소 커피 한잔을 올려놓고 앉았다. 멀리 빌딩 숲의 불빛과 전광판의 광고를 바라본다. 타락한 정치집단의 선전 깃발을 보니, 다시 힘을 내서 야생의 본능을 일으켜야만 할 것 같다. 어둠은 변두리에 있지 않았다. 권력 핵심부의 휘황한 무대 뒤에 절제를 모르는 어두운 야망이 부글거리고 있었다.
 
지금 한국은 심하게 병들어 있고, 일부의 기득권자들이 무지한 집단의 힘을 얻어 매국의 앞잡이가 정권을 잡았다. 밖으로는 숭미종일 외교, 안으로는 세계정치사에 유례가 없는 검찰통치prosecracy로 칼을 휘두르며 라이벌 제거와 역사왜곡, 자연파괴, 민생방치의 정치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파르티잔처럼 나는 다시 인왕을 넘어 광장으로 가야겠다. 아카시아 향기가 창문을 넘어오듯 밝게 타오르는 촛불의 포위로 시민의 정부를 되찾을 때까지. 기득권과 권력의 카르텔을 녹여없애고 분권형 책임정치, 국민 한 사람도 포기하지 않는 건강한 사회로 돌아설 때까지 말이다.
 
이 순간 생각나는 얼굴을 떠올리며 쌉쌀한 에스프레소 한잔을 더 마셔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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