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복을 벗고 세상을 입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일러스트=토끼풀

 
처음으로 혼자 비행기에 탄 것은 열여덟 살 여름의 일이었다. 당시 호주에 살고 있던 친언니를 만나러 퍼스까지 홀로 떠나게 된 것이다. 나는 항공성 중이염을 앓고 있는데, 그때는 그 사실을 미처 모르고 있던 탓에 10시간이 넘는 비행 내내 통증으로 심하게 앓아야 했다. 먹먹해진 귀를 손으로 감싼 채, 정신없는 상태로 서호주에 첫발을 내디뎠다.
 
나는 입고 간 반소매 티셔츠 위에 체크 셔츠를 둘러 입으며, 반대로 흘러가는 남반구의 계절이 퍽 낯설다고 생각했다. 어릴 적 휴양지에 몇 번 가본 적은 있었지만, 사실상 호주는 내 첫 해외 여행지나 다름없었다. 나는 쉴 새 없이 두리번거리며 눈에 닿는 모든 것에 신비로움을 느꼈다
 
그중에서도 가장 신기했던 건 사람들의 옷차림이었다. 마치 유행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저마다 옷차림이 달랐다. 아주 화려한 무늬나 색상의 옷을 입은 사람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고 겨울인데도 얇은 민소매 티셔츠만 걸친 사람도 많았다. 워낙 더운 지역이라 한겨울에도 26도까지 기온이 올라간다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게다가 호주 사람들은 맨발로 도시를 돌아다니는 일에 익숙한 듯 보였다. 양말 하나 신지 않는 발로, 아스팔트 길을 거침없이 디뎠다. 내가 신기하다는 듯 말하자, 언니는 이렇게 답해주었다.

“여기 사람들은 정말로 남의 시선 신경 안 써.”
 
그 말을 들으며, 나도 그 자유로움에 편승해 보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언니와 함께 스포츠용품 아울렛에 불쑥 들어가, 아무도 안 신을 것 같은 형광색 운동화를 두 개 사서 커플로 맞췄다. 형광 분홍색 배경에 형광 노란색 무늬가 들어간 그 운동화는 걸을 때마다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커플 신발을 맞춰 신고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는데, 옆에 서 있던 호주인 아주머니가 말을 걸었다.
 
“I love your shoes!“
 
언니는 자연스럽게 고맙다고 답하고는 그에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내게, 이곳 사람들은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 칭찬을 건네는 일을 좋아한다고 알려주었다. 누군가 멋진 옷을 입고 있거나, 멋진 헤어 스타일을 하고 있으면 언제고 다가가 가벼운 찬사를 보낸다는 것이다. 아주머니의 칭찬을 받고 나니 나의 형광색 운동화가 한층 더 멋지게 보였다.
 
우리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선착장으로 향했다. 멋진 형광색 운동화를 신은 채 로트네스트 아일랜드로 떠날 요량이었다. 로트네스트 아일랜드는 퍼스에서 페리를 타고 1시간을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외딴섬이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동물이라고 불리는 ‘쿼카’의 서식지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언니와 나는 자전거를 하나씩 빌려 섬 곳곳을 누볐다. 섬에서 머무는 내내, 내 머릿속에는 이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동안 나는 ‘세상에!’라는 말을 아무 생각 없이 뱉어왔구나. 세상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는 채로. 이 세상에는 믿기 힘들 정도로 아름다운 곳도 있다는 걸, 나는 그날 처음 알았다. 그곳에서 나는 핑크빛 호수를 봤고, 끝없는 평원을 봤고, 귀여운 아기 쿼카를 만났다.
 

 
잠시 쉬어갈 벤치조차 찾아보기 힘든 자연 친화적인 섬을 쉬지 않고 누비자니 다리가 뻐근하게 아파져 왔다. 때맞춰 찾아오는 출출함은 덤이었다. 섬에는 제대로 된 식당도 그리 많지 않아서, 직접 싸간 도시락을 먹어야만 했다. 우리는 전날 마트에서 산 양고기로 만든 도시락을 꺼냈다. 호주에는 양고기가 아주 흔하다는데, 나는 그때 태어나서 양고기를 처음 접해보았다. 양고기는 비린내가 많이 난다는 걸 모르고 아무 생각 없이 소고기 볶음밥을 만들 듯 요리한 탓에 도시락통에서는 비린내가 폴폴 올라왔다.
 
우리는 아무 그늘에나 걸터앉아서, 그 맛없는 도시락을 나눠 먹었다. 바닷바람에 머리카락이 엉켰고 열심히 볶아온 양고기는 식어버렸고 식탁은커녕 제대로 된 의자랄 것도 없었지만, 뭐가 그리 즐거웠던지 언니와 나는 끊임없이 웃었다. 신이 나서 형광색 운동화를 바닥에 마구 굴러댔다.
 

 
누군가 내게, 수많은 여행지 중 가장 놀라웠던 곳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나는 단연 로트네스트 아일랜드를 꼽는다. 그곳에는 어떤 근심도 우울도 없었다. 꽤 오래된 일이지만, 눈을 감으면 아직도 그날의 바람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내 형광 분홍색 운동화에 맞닿은 분홍빛 호수, 까만 쿼카의 눈망울과 그 뒤로 끝없이 펼쳐진 바다의 모습이.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내가 지친 마음으로 서울의 지하철에 오를 때에도 지구 반대편에는 천국 같은 섬이 고스란히 존재하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 내게 언제나 위안을 준다. 나는 그곳에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깃털 같은 마음을 두고 왔다. 언젠가 이곳에 다시 돌아오게 되면, 기쁜 마음으로 나의 열여덟 여름을 주우리라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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