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해유록] 1부

일러스트=토끼풀

 
#후쿠오카 공항에서 떠올린 잇쇼켄메이(一所懸命) 정신

 
고3 겨울방학 때 가족여행으로 도쿄를 들린 이후 5년만의 일본 방문. 굉장히 설렜지만, 첫인상은 그렇게 설레지 못했다. 입국 수속 절차에서 적잖은 시간과 집중력을 소모해야 했기 때문이다. 작년 가을 이후부터 급격히 증가한 한국인 관광객을 의식해서인지, 후쿠오카 공항 입국 통로에는 수십명의 안내 요원들이 배치되어 입국 수속을 도와주고 있었다. 물론 입국 수속 절차 자체는 한국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여권을 인식하고, 코로나 문진 정보를 확인하는 등의 통상적인 절차였다.
 
그러나 그 절차를 밟는 단계가 다소 까다로웠다. 직사각형의 스캔 기계에 여권과 지문을 인식한 뒤, 안내요원에게 마스크를 벗은 얼굴을 보여줬다. 그리고 또 출입국 검사관에게 코로나19 문진 QR코드를 보여주고, 여권을 보여주고, 다시 마스크를 벗어 신원을 확인해줬다. 입국 검사가 끝났다고 끝난게 아니었다. 수하물을 찾고, 수하물 관련 QR코드를 검사 기계에 스캔해야 완전히 통과할 수 있었다. 모든 입국 절차를 마무리하는데 못해도 2시간 이상이 걸렸다. 나중에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인천공항 입국 절차는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던 것을 기억하면 꽤나 큰 차이었다. 솔직히 번거롭고 복잡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는 첫인상이었다.

그러나 일본이란 국가를 입국 절차 하나만 보고 판단할 수는 없다고 본다. 돌이켜보면 일본 사회가 한국 사회처럼 빠르고 디지털 문법이 완전히 정착된 것은 아닐지라도, 그 이면에는 보이지 않는 내공을 느낄 수 있었다. 입국 수속에서의 접객 태도가 그랬다. 못해도 10명이 넘는 안내원들이 각각의 입국자들을 전담 마크하며 친절하게 입국 절차를 알려주었고, 대기줄에 배치된 안내원들 역시 입국 수속 시 필요한 준비물이 적힌 플랜 카드를 보여주며 몇분 간격으로 입국자들에게 공지를 해줬다.
 
물론, 인건비만 따진다면 그러한 안내원들 하나하나가 마치 위장실업(?) 요소로 비춰질지도 모르겠지만, 외려 나는 그런 점이 일본 특유의 직업 정신을 느끼는 계기로 다가왔다. 다른 국가도 아니고 가장 인접하고 익숙한 한국에서, 그리고 최근 양국 외교 관계가 거의 최악에 가까운 상태라 한들, ‘내 나라에 온 손님’이라면 최선을 다해 도와주는 태도. 그런 태도가 아직도 일본을 국제사회의 중추 국가로 자리매김하게 하는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그러한 섬세한 접객 태도를 보면서 개념이 하나 떠올랐다. 일본 직업 정신의 원천 개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잇쇼켄메이(一所懸命)’다. 해당 개념은 일본에서 흔히 ‘어떤 일에 목숨을 걸 정도로 최선을 다한다’는 맥락에서 쓰인다고 하는데, 물론 공항 입국 지원에 목숨까지 걸 필요가 있겠냐만, ‘내 나라에 온 손님을 최선을 다해 맞이한다’는 정성만큼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정성이 한국 뿐만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일본을 다시 찾고 싶게 만드는 원동력일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어떤 일이든 일관성 있게 최선을 다하려는 문화는 공항 접객 태도에서만 유효한 것 아닌 듯 하다. 최근 읽었던 권석준 교수의 《반도체 삼국지》에서도 비슷한 의견을 확인할 수 있었다. 권석준 교수는 그러한 잇쇼켄메이 정신이 일본의 기초과학 분야의 토대를 견고하게 만드는 지적 토양(권석준, 『반도체 삼국지』, 뿌리와 이파리, 2023, 22~24p) 짚고 있었다. 당장 뚜렷한 성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각 분야의 기초 토대를 쌓기위한 연구와 작업들이 축적되어 오늘날 일본의 과학기술경쟁력을 만들었고, 그런 축적의 토대에는 잇쇼켄메이 정신이 있다는 것이다. 한편으론 그런 일본과 달리 한국이 과학 분야에서의 노벨상 같은 쾌거는 고사하고 적잖은 분야에서 부족한 기본기를 노출하는 세태는 소명의식에 관한 사회적 전통이 상대적으로 빈약한 것이 원인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맥락에서 2019년의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NO JAPAN’, ‘다시는 일본에게 지지 않겠다’ 같은 구호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에는 일본산 반도체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의존에서 벗어나 소위 ‘반도체 주권’을 실현하자는 목소리가 정치권과 시민사회 곳곳에서 적잖이 관찰됐지만, 과연 일본산 특정 품목이나 제품에 대한 의존만 줄이면 그게 일본과의 경쟁에서 승리를 가져다 주는 것일까? 단순히 투자와 연구만으로 축적할 수 없는, 특유의 직업정신, 소명의식 같은 요소가 그런 과학기술경쟁력의 근간이라는 점을 간과한다면, 과연 일본과의 어떤 경쟁에서 긍정적인 결과를 장담할 수 있을까? 설령, 경쟁에서 이긴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장점과 강점을 배우지 못하는 승리라면 그게 얼마나 큰 의미가 있을까?
 

 


 
#공중 위생 실태는 한 사회의 정신적 성숙도를 가늠하는 기준이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버스를 타고 이동하며 바라본 풍경에서도 놀라운 점이 많았다. 창문 밖 풍경에서 보이는 골목길, 공원, 주택 마당 등에서 작은 쓰레기 하나 조차 찾아보기 어려웠기때문. 일본 애니메이션 속에서나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깔끔한 풍경이 오히려 그들의 현실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는 것 같았다. 5년 전 방문했던 도쿄에서도 도시가 전반적으로 참 깔끔하다는 인상을 받긴했지만, 도쿄 같은 대도시도 아닌 해안 지방의 중소 도시에서도 같은 인상을 받을지는 예상치못했다. 동일선상에서 놓고 비교하는 게 큰 의미는 없을 수 있겠으나, 한국의 광역권 도시나 시골에서는 일본과 같은 느낌을 받았던 적이 별로 없었던 듯 하다. 그만큼 일본 사회에서의 청결함은 그 수준이 남달랐다는 얘기다.
 
깔끔한 건 단지 도로나 공원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후쿠오카 공항을 떠나 시모노세키 가라토시장에서 들렸던 화장실에서도 일본 특유의 깔끔함을 보여주는 요소가 있었다. 그건 바로 화장실 대변기 뒤에 비치됐던 변기커버세정제. 그리고 그런 세정제는 시모노세키 뿐만 아니라, 다음날 방문할 하기시 박물관에서도, 그 다음날 방문한 야마구치시의 우동가게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굳이 공항이나 공립 도서관 같은 곳을 가지 않더라도, 어떤 건물의 어떤 화장실을 들어가도 변기커버세정제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는 건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지점이었다. 자신이 변기를 사용하며 발생한 오염물질을 다음 사람의 피부에 닿지 않게 하겠다는, 궁극적으로 타인에게 ‘결코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문화를 실감하게 하는 요소였달까. 한국의 화장실 문화도 딱히 나쁘다고 할순 없지만, 일본의 그것과 비교해선 분명한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흔히 어떤 국가의 성숙함과 내공을 가늠하는데 있어 문화 콘텐츠나 첨단 제품에 집중하는 경우가 많지만, 나는 외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 국가의 진정한 성숙함이 자연스레 흘러나온다고 본다. 최근 대학생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논란을 빚은 경북대 사범대 쓰레기통 사진을 예시로 들 수 있겠다. 그 사진 속엔 커피가 담겼던 플라스틱컵부터 온갖 쓰레기가 넘쳐 나뒹굴고 있었고, 그 사진 속 풍경은 보는 이들의 눈쌀을 찌푸리게 만들기 충분했다. 적잖은 사람들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예비 교사들이 어찌 저런 수준 낮은 시민의식을 보여줄 수 있냐’며 비판의 목소리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과연 그런 사진 속 풍경이 경북대 사범대 쓰레기통에만 한정해서 볼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신촌·홍대의 길거리, 종로구 속 여러 골목에서도, 심지어 내가 다니는 상명대학교 쓰레기통에서도 비슷한 광경을 자주 목격하곤 했다.
 
쓰레기통만 문제일까? 화장실 청결도부터, 길가에 나뒹구는 비닐봉지나 하수구 틈에 잔뜩 끼어있는 담배꽁초 등등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유심히 관찰하지 않으면 지나치기 쉬운 생활 곳곳의 풍경들에 대해 한국인들은 과연 청결함을 자신할 수 있을까? 생활 속의 작은 것들에서부터 섬세함과 성숙함이 묻어나오지 않는다면, 그런 국가·사회를 진정한 의미의 ‘선진국’이라 할 수 있을까? 선진국을 모방하고 따라잡는 중진국 수준을 넘어, 이제 그 선진국 반열에 진입하게 된 한국 사회는 과연 후발주자들에게 어떤 가치와 풍경을 제시할 수 있을까? 이렇게 답사 첫날부터 목격한 일본의 여러 풍경들은 내게 여러 문제의식을 던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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