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 오늘도 구룡마을에는 「쇼스타비치의 교향곡 11번」이 흘러나온다

일러스트=바로크

 

“이제 차르는 없다. 하느님도 없다!“

 
그날로 러시아인에게 아버지 차르는 죽고야 만 것이다. 차르가 실제 러시아 백성을 사랑했느냐는 관계없었다. 설령 차르가 백성을 처음부터 미워했더라도 그런 사소한 사실관계는 그 날로 하여금 무효가 되었다.

아버지 차르가 자애로운 하느님의 대리자로서 빈곤과 고통으로 점철된 불합리한 농민의 삶을 안아주고, 자식인 백성들은 하느님 가정을 수호하기 위한 신성한 생산의 전투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을 약조한 그 절대적 계약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으로 되어버린 “피의 일요일”의, 그 어떠한 무구도 들지 아니한 농민의 말라붙은 핏자국과 살점 위에서 그런 사소한 사실관계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소련의 작곡가 드미트리 드미트리예비치 쇼스타코비치가 작곡한 교향곡 제11번 G단조 작품 103 ‘1905년’에는 이와 같은 폭풍의 시대가 마치 ‘음악적 판화’로 찍어낸 것처럼 담겨 있다. 1957년 10월 혁명 40주년 기념일에 맞춰 쓰여진 이 곡에 담겨진 역사적 사실은 어디까지나 1917년의 혁명까지 이어지는 러시아 혁명사의 전주곡이자 좌절의 역사인 1905년 러시아 혁명까지의 일련의 사건이며, 그중에서도 혁명의 좌절에까지 모두 담긴 것이 아니라 피의 일요일 사건과 이어지는 민중봉기의 클라이막스까지다.

빈곤과 학대로 터져나오는 좌절한 민중의 원망, 원념이 전통적-기독교적 국가관에 의하여 억제되며 갈 길 없이 떠돌다 차르 앞의 탄원서로 나타나다가 차르 수하의 무뢰배에 의해 분노로 대체되고, 희생자에 대한 추념과 깨어진 계약 앞에서 자유를 선언한 민중의 바리케이트 앞 전진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4악장의 이 교향곡에 담겨져 있다.

그러나 4악장에 걸쳐서 민중의 좌절이 분노가 되며, 분노는 곧이어 혁명의 불길이 되어 터져나오며 끝을 맺는 이 음악적 전개를 해석하는 미래의 우리에게 있어 함의하는 바, 곧 진실은 결코 당대의 사건에 그치지 않는다. 당대 러시아에 대한 회고에 그치는 것이 아닌 스탈린 시대가 막을 내렸던 당내의 상황까지도 이어진, 압제자의 탄압에 민중이 고통받는 세계의 현실을 담아낸 역사적 푸가(fuga; 음악적 모방대위법의 일종)였다.

이는 그의 곡이 가진 음악적 특성이 푸가라는 것이 아니라, 마치 돌림노래처럼 반복되는 여러 성부의 자그마한 멜로디가 마디가 지날수록 겹겹이 쌓여 거대한 물결처럼 밀려 들어오는 것처럼, 그가 처했던 러시아 역사의, 그리고 전 인류가 마주한 역사의 진실이 그와도 같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민중의 고난받는 역사가 혁명을 말미암아 구체화된다는 고리타분한 혁명역사론을 들먹이는 것이 결코 아니다. 허나, 좌절과 분노와 질서의 재정립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이 우리가 인류사에서 끊임없이 마주한 역사적 진실임을 이야기하고 싶다. 그것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가는 결국 각론에 불과할 것이다.
 


 

불타버린 구룡마을 뒤로 비치는 강남의 높은 빌딩들, 그 수직적 구분은 명확하다 / 사진=Wikimedia

 
1905년의 러시아 겨울궁전의 처량한 정경은 이미 우리의 눈가를 비비면 나타난다. 그곳의 상징적인 장소는 바로 강남의 구룡마을이다. 대한민국 최고의 부가 모인 도시 강남의 가장 끝자락, 대모산 밑에 얼기설기 지어진 판자촌 구룡마을, 그곳에서 조금만 고개를 들어도 강남의 고층빌딩과 고급 아파트 단지가 보이나 이곳의 삶은 최소한의 주거권과 안정조차도 부여받지 못하는 철저한 수직적 구분으로 나타난다.

비록 이곳의 빈곤이 한국의 마지막이기는커녕 서울의 마지막에도 속하지 못하지만, 대한민국에서 이곳보다 1905년 1월 22일 일요일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궁전에서 보이는 지친 군중의 모습이 가장 겹쳐보이는 곳은 없다. 이미 임계점에 다다른 누군가의 절망과 절규가 눈에 선하듯 보이나 결코 그것이 궁전 안의 자들에게 현실로 다가올 수 없는 아이러니한 현실이 가장 드러나는 곳, 그리고 냉전체제와 고도성장 이후 정립된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의 약속이 마치 무너진 것과도 같이 보이는 장소는 이곳이리라.

개인의 노력과 창의로 바람직한 미래를 맞이할 수 있다는 현대 대한민국의 사회계약의 미명이 만든 굴레는 아이러니하게도 빈부격차와 차별적 삶을 강요했다. 마치 차르와 백성의 신적 권위로 인한 관계와도 같이 당연히 적용되었던 이 구조는 곳곳의 파열음에도 불구하고도 신앙과도 같은 약속이 파괴를 맞이하지 못한 채로 광장 앞에서 펄럭거리며 날아다는 탄원서와 같이 휘날리고 있다.

신분상승의 사다리가 무너지며 약속의 이행은 종이쪼가리로 변모하고야 말았다. 이제는 평생을 일해도 최소한의 의식주마저 보장받지 못하며, 삶의 질이 달라진다는 보장도 없이 내일의 빈곤을 우려해야 하는 세상이 찾아왔다. 마치 차르의 납탄이 광장 앞 노동자의 힘없는 몸을 꿰뚫듯, 청년은 재생산을 포기하고, 노인은 번개탄을 소망하는 시대가 찾아왔다. 이제는 1905년의 가혹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광장 앞 겨울처럼 그 한계는 공이를 기다리는 뇌홍처럼 조그마한 충격만을 기다린다.

1905년의 불길이 1917년의 횃불이 되어 러시아 전역을 붉은 물결로 뒤덮었던 것처럼, 대모산 아래의 작은 산마을에서 느껴지는 이 알 수 없는 위화감은, 우리의 더는 갈길 없는 찢긴 약속과 시대의 꿰뚫린 몸뚱아리 앞에서 밀려오는 알 수 없는 파도의 흐름은 과연 어디로 향할 것인가. 좌절과 분노와 질서의 재정립의 시간은 과연 찾아오겠는가.

뒤집힌 약속에 대한 군중의 분노는 과연 로마노프 왕가의 불타버린 왕궁과 크렘린궁의 붉은 도열처럼 거울상의 아이러니한 대조표를 만들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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