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하지 않은’ 5.18 광주시민들

일러스트=토끼풀

 
5.18 민주항쟁 23주년을 앞둔 어버이날, 5.18 유공자가 숨졌다. 시신은 광주광역시 양동의 한 원룸에서 발견되었다. 자칭 우파들은 5.18 유공자가 지나치게 많은 혜택을 받는다고 주장해 왔다. 5.18 유공자가 다른 국가유공자에 비해 호의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원룸에서 발견된 5.18 유공자는 십수 년 동안 혼자서 생활고를 겪었다. 사실 국가보훈처가 공개한 자료를 보면, 5.18 유공자가 호의호식한다는 주장은 왜곡이라는 점이 금방 드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정당한 의혹 제기’라는 미명으로 반복되는 5.18에 대한 음해를 여전히 마주하고 있다.
 
사실 관계가 명백한 사안인데도 불구하고, 5.18 광주항쟁은 어째서 꾸준히 음해받고 있을까? 여러가지 원인을 짚어볼 수 있다. 하나는 호남 혐오 정서다. 호남이 민주당에만 투표한다는 이유로, 우파 사이에는 호남 혐오가 퍼져있다. 그런 정서가 5.18에 대한 왜곡을 부추기는 것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전두환 정권을 변호하려는 심리다. 한국의 정당은 개인들이 이념을 중심으로 뭉친 집합체가 아니다. 인물을 중심으로 뭉친 결사체다. 그렇다보니, 일부 보수당원은 전두환이라고 하더라도 같은 편을 지키고 싶어할 수 있다. 또는, 5.18 왜곡이 보수 버전의 ‘깨시민’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의례처럼 굳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어떤 동기든, 여기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아무도 5.18 민주항쟁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5.18 민주항쟁에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북한 개입설이나 우파 보존 같은 ‘특별한’ 시각을 5.18에 대입한다. 자연히, 프레임에 갇혀서 사실을 보지 못할 수 밖에 없다.
 
프레임에 갇힌 것은 일부 강성 우파만의 문제가 아니다. 5.18 민주항쟁을 성공적으로 왜곡하는 데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본인들의 입맛에 맞게 특정한 부분을 확대, 과장하여 본질을 왜곡하는 모든 움직임이다. 전남대학교 사범대학 1호관의 동쪽 벽에는 <광주민중항쟁도>가 그려져 있다. 이 그림에서 시위대는 “민족해방”이라고 적힌 깃발을 들고 있다. 전남도청에는 붉은 바탕에 검은색 글씨로 “혁명광주는 지금도 계속된다”라고 적힌 현수막도 걸었다. 이 그림은 5.18을 사회경제적인 저항 운동으로 보는 좌파의 시각을 따른 것이다.
 
5.18의 원인을 설명할 때, 일부 좌파 학자들은 70년대 말에 촉발된 노동자들의 투쟁과 5.18을 연관짓는다. YH 무역사건, 부마항쟁 등의 여파가 기존에 지역적으로 차별받은 광주시민에게 전달되어 자연스럽게 자본주의와 미국에 대해 반감을 가지게 되었고, 이 반감이 5.18 민주항쟁으로 표출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광주 노동자들이 “반미”, “민족통일”, “노동자 단결” 등의 구호를 외쳤다는 증언을 근거로, 강성 좌파는 5.18이 자본주의와 미제에 맞서는 민중항쟁이라고 주장한다. 매년 5.18 기념행사가 다가올 때마다 5.18 민주묘지에 노동조합 및 반미 정당이 옹기종기 모여 우파 타도와 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것도 이러한 시각에서 발생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5.18에 참여한 시민의 진위를 크게 왜곡하고 있다. 우선 5.18 민주항쟁의 가장 큰 원인인 12.12 쿠데타의 주역인 전두환, 노태우 등은 한국의 민주화 이후 재판에서 ‘반란수괴’ ‘내란수괴’ 등의 죄목을 통해 유죄 판결되었다.1) 따라서 5.18 광주항쟁은 법적 근거를 통해 ‘대한민국을 전복시키려는 쿠데타 세력에 저항하여 헌정질서를 지키려는 광주시민들의 저항운동’ 으로 볼 수 있는 근거를 가진다. 그러므로 5.18 광주항쟁의 기원을 박정희 정부 시기부터 이어져 온 지역갈등과 노동환경의 가혹함, 반미 정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신군부의 폭거에서 비롯했다고 보는 것이 사법부의 판단이다.
 
두 번째로 광주에서 격렬한 저항이 발생한 원인을, 호남 시민들이 유독 반 자본주의 정서가 강했다고 해석하는 근거가 빈약하다. 오히려 광주시민들은 미국의 항공모함이 부산항에 입항했다는 소식을 듣고, “민주주의의 수호자”인 미군이 광주를 구원하러 왔다고 믿었다.2)3) 이러한 점이 시사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당시의 광주시민들의 목표는 “체제 전복” 과 같은 과격한 것이 아니라, “체제 수호” 에 의미를 두었으므로 “자유민주주의의 상징”인 미군의 입항을 아군의 개입으로 인식했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는 5.18 광주항쟁 이후 확산된 반미정서에 대한 해석에 대해서인데, 70년대 후반부터 조금씩 표출되던 반 자본주의 정서가 5.18을 거쳐 전국으로 확산했다고 보는 관점보다는, 자유민주주의의 상징이라 불리던 미국이 신군부의 안정화를 우선순위로 둔 탓에 광주항쟁을 외면한 것에 대한 ‘실망’과 ‘배신감’이 이후 반미 정서의 주요 원인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세 번째로 광주시민의 반응이다. 좌파 지식인들은 시위 참가자들이 “반미” 나 “노동자혁명” 등의 구호를 외쳤음을 근거로 이를 주장했으나, 이러한 구호에 대한 다수의 광주시민과 시민군의 반응을 통해 오히려 경계와 배척의 대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수사관들은 광주시민들의 이러한 반공주의를 역으로 이용하여 “반미”, “혁명”, “전복” 등의 과격한 표현을 하는 연설가들을 간첩으로 지목하였고, 이에 주변에 있던 시민들이 즉각 호응하여 그들을 붙잡아 군에 인계한 사례를 여럿 확인할 수 있다.
 
시민들 사이에서도 시위 도중 누군가가 간첩으로 지목되면 군과의 대치를 잠시 멈추고 혐의자를 군부대에 넘길 정도였다. 시민군 자체에서도 조사과를 설치하여 과격한 연설을 하는 인물을 대상으로 간첩혐의조사를 했다는 점을 볼 때, 이는 시민들이 강력한 반공주의 정서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4) 5.18 연구에 대해 가장 권위있는 연구자로 평가받는 김영택 교수는 광주시민군을 “대한민국 사상 최초의 시민 무장투쟁을 의미하는 것”5)이라 정의하며 광주항쟁이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반공 자유민주주의 세력과 정치군인과의 갈등이었음을 주장했는데, 그 근거로 5.18 당시 연설가였던 전옥주, 차명숙의 과격한 연설 내용에 당황한 학생들이 군 수사기관에 의뢰한 내역과, 이들을 붙잡은 한 시민이 직접 군부대까지 운전해 넘긴 사례를 소개했다.6)7)
 
세 가지 이유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5.18 당시 광주시민들의 행동은 반공과 자유민주주의를 국시로 한 대한민국 시민들의 조직적인 민주화 투쟁이었다는 점이다. 이는 4.19혁명, 6월 민주항쟁 역시 마찬가지였으며, 이들이 대한민국 참여민주주의에 가져온 유산 중 하나는 시위대가 민간인이나 은행을 상대로 폭력과 약탈을 저지르지 않은 성숙한 시위문화를 정착시켰다는 것이다. 이는 대한민국 민주화투쟁의 주체가 힘없는 시민들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고, 현대에도 이 도덕성을 잃지 않았기에 우리는 여전히 무차별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며 행동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데로 5.18 민주항쟁은 좌파와 우파 양측에서 이중으로 왜곡당하고 있다. 마치 대상을 왜곡해서 보여주는 렌즈 두 겹을 통해 세상을 보는 것과 같다. 렌즈 하나를 제거해도 여전히 대상은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착용자는 렌즈가 겹쳐져 있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기에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알아차리기 어렵다. 5.18 민주항쟁은 분명 특별하다.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고, 시민군이 반란군에 맞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하지만 5.18 광주시민들은 그저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그러나 <이중 렌즈>를 통한 왜곡은 5.18 광주시민들을 반자본주의자, 반미주의자, 폭도, 북한군 특수부대 따위로 ‘특별하게’ 생각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 점을 상기하고 5.18 문제를 다시금 보아야 한다. 가령 5.18 유공자 공개 문제는 어떠한가, 많은 광주시민들이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신군부 ‘반란군’들의 폭력에 힘없이 당해야만 했다. 신군부에 맞서 싸운 시민군들 역시 범죄의 피해자였음을 인식해야 한다. 무관계한 자가 피해를 겪은 것처럼 위장하여 거짓된 명성을 취하는 것과, 범죄 피해자들에게 신상을 만천하에 공개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다른 사안이다. 유공자를 공개하는 것은 오히려 5.18 광주 시민들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 것이고, 이는 또다른 왜곡을 야기할 것이다. 그러니 부디 5.18 광주시민들을 특별한 시각이나 편견 없이 그대로 바라봐달라. 그들 역시 우리와 같은 힘없는 시민에 불과했다.
 


 
1) 국가법령정보센터, “대법원 96도3376판결”, 반란수괴, 반란모의참여, 반란중요임무종사, 내란수괴, 내란모의참여, 내란목적살인 등 13개 혐의, 1997. 4. 17 선고
2) 김철원, “5.18 33주년 기획보도, 33년 전 오늘 9편 – 5.18과 미국”, MBC, 2013년 5월 25일자
3) 이는 1980년 5월 26일 “민주화투쟁 대학생 대책본부 가두방송 원고” 에서도 나타난다. 7번 항 : “부산에는 미항공모함 2대가 정박 중에 있습니다(…) 광주 시민을 지원하기 위해 왔습니다. 시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원문 출처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자료총서 제 2권”, 광주광역시 5.18사료 편찬위원회, 1997, p82
4) 김정한, “1980 대중 봉기의 민주주의”, 소명출판, 2013, pp86-87
5) 김영택, “5월 18일 광주 광주민중항쟁 그 원인과 전개과정”, 2010, 역사공간, p379
6) 김영택, 2010, pp426~428
7) 수사당국에 의해 두 인물은 간첩이 아님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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