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복을 벗고 세상을 입다] 누구에게나 딱 맞는 장갑이 있다

일러스트=토끼풀

 
새끼손가락이 짧아서

모두가 그렇듯, 내게도 독특한 특징들이 몇 개 있다. 내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아, 그 보조개 쏙 들어가는 사람?”이라고 말할 정도로 눈에 띄는 입꼬리 보조개. 어린 시절 크게 다쳐서 일그러져 버린 엄지발톱 같은 것. 하지만 이런 것들은 삶에 큰 불편을 주지 않는다. 눈에 띄게 짧은 새끼손가락에 비하면!
 
내 새끼손가락은 남들에 비해 눈에 띄게 짧다. 사실 길이가 짧다기보다는, 새끼손가락이 손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되어서 짧은 것처럼 보인다는 게 맞는 말일 것이다. 어쨌거나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있자면, 약지에 비해 2cm 이상 훅 들어간 새끼손가락이 눈에 띈다. 친구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며 손을 보여주면 “어, 정말 그러네?” 하며 신기한 듯 내 손을 조물조물하곤 한다.

새끼손가락이 좀 짧은 게 대수인가. 대체 뭐가 불편하다는 건가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장갑을 껴야 하는 계절이 오면, 남들보다 한 마디 길이나 짧은 새끼손가락이 그렇게 거슬릴 수가 없다. 수족냉증이 있는 내게 장갑은 아주 유용한 아이템인데, 언제나 맞지 않는 신발을 신은 사람처럼 새끼손가락 부근을 덜렁거리며 끼고 다녀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나는 취미로 요리를 즐겨하는 편인데, 비닐장갑을 끼고 부추 같은 걸 양념에 무칠 때면 그 불편함이 배가 된다. 조금 큰 장갑을 착용하는 건 아무래도 좋지만, 한 마디나 남아 펄럭거리는 장갑은 손톱 끝의 거스러미처럼 신경 쓰이는 존재다.
 
어릴 적에는 내 장갑만 한 마디가 남는 것에 대해 불편하게 여긴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새끼손가락이라는 건 누군가와 손가락을 걸고 약속할 때가 아니고서야 그리 눈에 띄는 존재도 아니니까. 그리고 장갑이 좀 크면 아무렴 어떤가. 약간 펄럭거리기는 해도 못 참을 정도도 아닌데.
 
그러나 열 살 무렵의 어느 날 학교에서 한 친구가 “어? 혜교! 다른 손가락은 다 나보다 긴데 새끼손가락이 왜 이렇게 짧아?”라고 말하는 순간부터 이야기는 달라졌다. 그때부터 나는 나만 이렇게 맞지 않는 장갑을 낀 채 살아야 한다는 사실에 작은 불만을 품게 된 것이다.
 
이 세상에는 다양한 모양의 손이 있는데, 장갑은 왜 다 비슷하게 생긴 걸까? 결국 나는 장갑을 낄 때마다 ‘그래야 돈이 되니까 그렇지! 너라면 안 팔릴 장갑 만들겠어?’라는 이성과 ‘그래도 아쉬울 수는 있지 않나! 나는 비싼 돈을 내고 맞춰야만 손에 들어맞는 장갑을 가질 수 있다는 게!’라는 내면의 싸움을 겪는 그런 어른으로 자랐다.
 


 
나도 꼭 맞는 장갑을 갖고 싶어


이탈리아의 겨울은 우리나라만큼 혹독하지는 않지만, 다른 방향으로 매서웠다. 건조한 한국의 겨울과는 다르게 축축한 한기가 온몸을 감쌌다. 나는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손을 꾹 눌러 쥐며 붉은 지붕 사이를 누볐다. 장갑 가게를 찾아낼 생각이었다. 이번에야말로 내 손에 꼭 맞는 장갑을 찾아내겠다고 결심했다. 예로부터 피렌체는 장갑으로 유명하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검색창을 몇 번 뒤적거린 끝에 3대째 가업을 이어 장갑을 만든다는 장인의 가게를 찾아갔다. 모든 장갑을 수작업으로 만들고 누구에게나 딱 맞는 장갑을 내어주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가게는 명성에 비해 정말 작았다. 마치 <해리포터> 영화 속 올리밴더의 지팡이 가게처럼, 장갑으로 가득 찬 벽면이 높은 천장까지 닿아있었다. 책 대신 장갑이 꽂혀있는 도서관 같기도 했다.
 
가게로 들어서자, 주인은 책상 위에 작은 쿠션을 하나 올려주었다. 손을 보여달라는 뜻이었다. 내가 신기해하며 손을 올리자, 그는 내 손을 여러 각도로 관찰하기 시작했다. 각 손가락이 얼마나 긴지, 손이 얼마나 두꺼운지를 보는 듯했다. 1분도 지나지 않아 관찰은 끝났다. 그는 망설임 없이 벽에 가득 쌓인 장갑 중 서너 개를 뽑아내더니 내 앞에 펼쳐 보였다. 색상과 디자인이 각각 다른 장갑이었다.
 
그가 그중 한 개를 비닐에서 꺼내 내 손에 끼워주던 그 순간, 나는 새끼손가락 끝에 장갑이 닿는 것을 처음 느껴보았다. 손의 두께와 각 손가락의 길이까지 완벽하게 들어맞아서, 마치 내 손을 감싸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렇게나 꼭 맞는 장갑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해 본 적 없었다. 마치 누군가 내 손의 치수를 재서 맞춤 제작한 것 같았다.
 
새끼손가락 끝부분을 꾹꾹 눌러보며 신기해하는 나를 보며, 그는 씨익 웃어 보였다. 이제야 천장 끝까지 가득 차 있는 장갑 수납장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이 장갑들은 수없이 다양한 손의 모양에 맞게 분류된 거였다. 그리고 이 장인은 손을 잠시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수천 종류의 장갑 중에서 가장 잘 맞는 것을 골라낼 수 있었다.
 
나는 우아한 디자인의 회색 장갑을 하나 골랐다. 두 개를 사고 싶었으나 지갑 사정이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여행지에 가서 장갑을 하나 사는 일이 남들에겐 별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지 몰라도, 내게는 정말 의미 있고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 평생 꼭 맞는 장갑을 착용해 본 일이 없는 내게는.
 
많이 팔리지 않을 것을 알아도, 온갖 특이한 손 모양에 맞는 장갑을 만드는 사람이 있다. 자신의 가게에 들어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 손에 꼭 맞는 장갑을 사 갈 수 있도록. 그 작은 장갑 가게에서 나는 새로운 사실을 알아냈다. 누구에게나 딱 맞는 장갑이 있다는 걸. 그 어느 특이한 손을 가진 사람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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