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바로크

 
“내가 보기엔, 너 심각한 일 중독이야.” 친구가 잠옷을 건네주며 말했다. 당시 나는 친구 방의 가장 구석 자리에 쪼그려 앉아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었다. 짐을 풀기 위해 앉으려던 찰나 급한 업무 연락이 온 것이다. 나는 한 손을 뻗어 잠옷을 받아 들면서 고맙다고 답했다. 친구는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는 눈치였다.

스물한 살 무렵이었다. 오랜만에 모인 자리에서, 친구들은 모두 저마다의 재미있는 일상을 이야기했다. 누군가는 연극 동아리에 들었다고, 누군가는 소개팅에서 괜찮은 사람을 만났다고. 나도 머리를 굴려 내 일상 속 여가거리를 찾아보려 했다. 그러나 당시 나는 큰 행사를 하나 주최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하루에 12시간 이상 일에만 매달리고 있었다. 친구들은 뭐하냐는 질문을 던질 때마다 일하는 중이라고 답하는 20대 초반이 어디 있냐며, 잠시 일을 쉴 것을 권했다.

나는 덜컥 겁이 났다. 단체를 운영하기 시작한 이후로, 한 번도 제대로 쉬어본 적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자리를 비워도 괜찮을까? 돈과 시간을 쓰기만 하는 일에 집중해 봐도 괜찮을까?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어느 새벽 갑자기 키보드 위로 뚝 떨어진 핏방울을 보고서, 그리고 태연하게 휴지로 코피를 닦아내고서도 무언가를 쓰고 있는 나를 보며 불현듯 그 심각성을 인지했다. 나는 공원과 영화관 대신 노트북 앞에 앉아 내 모든 청춘을 갈아 넣고 있었다.

아무래도 휴양을 떠날 필요가 있겠어, 그런 생각을 하며 노트북에 새로운 창을 열었다. 발리? 하와이? 치앙마이? 물가가 비싼 곳을 제외하고, 항공권이 너무 비싼 곳도 제외했다. 수영장에나 둥둥 떠 있고 싶으니 호텔 수영장이 있는 곳으로 찾아보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고른 곳이 바로 세부였다. 나는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세부행 항공권을 끊었다.

여행 계획을 꾸려놓고 나면 들뜬 마음에 시간이 빨리 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여행을 기다릴 정신도 없이 다시 일에 몰두했기 때문이다. 준비하던 행사를 마무리하고 나니 어느새 출국일이었다. ‘정신 차려보니 어느새 캐리어를 끌고 공항에 도착한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표현이 적합할 것이다. 인터넷이 터지지 않는 비행기에서 나는 내내 초조해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업무 연락을 확인하고, 잠들기 직전까지 일에 몰두하는 게 내 일상이었기 때문이다. 비행기에 올랐는데도 여행이 실감 나지 않아 걱정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걱정이 흔적도 없이 사그라들었다. 이전까지 나는 동남아시아권 국가에 가본 경험이 없었다. 주위 친구들에게 꽤 더울 거라는 이야기만 전해 들었을 뿐, 그 강도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다. 공항 문을 나서자마자, 마치 다른 차원으로 넘어온 듯 뜨거운 공기가 온몸을 훅 감싸왔다. 아, 내가 필리핀에 왔구나. 이보다 더 생생하게 실감할 수는 없었다. 나는 선선한 바람을 그리워하며 서둘러 호텔로 향했다.

운이 좋게도 호텔 측에서 첫날부터 내 방을 스위트룸으로 업그레이드해 줬다. 바다가 한눈에 내다보이는 방을 보며 감탄하는 것도 잠시, 당장 시원한 물속으로 뛰어들어야겠다는 생각이 굴뚝같았다. 서둘러 수영복을 챙겨입고 건물을 나서자 파랗게 넘실거리는 물이 나를 반겼다. 나는 선베드에 핸드폰을 대충 올려두고는 고민의 기색도 없이 몸을 담갔다. 시원한 물속을 헤엄치며 야자수 사이를 누비고 있자니 온갖 걱정이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다.
 

필리핀 세부

 
이번에는 휴식을 만끽해 볼 요량으로 로밍조차 하지 않았다. 팀원들에게 며칠간 푹 쉬다 와도 괜찮겠냐고 미리 양해를 구하자, 미안해할 필요 없으니 제발 신경 쓰지 말고 푹 쉬라는 핀잔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를 만끽하던 것도 잠시, 어디선가 익숙한 벨소리가 들려왔다. 카카오톡의 보이스톡 안내음이었다.

“네, 아뇨… 그 부분은 그렇게 추진하시면 안 될 듯하고…” 협력사의 연락이었다. 전화가 닿지 않는다며 카카오톡으로 연락을 취한 것이다. 다른 운영진에게 일을 넘길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수영장을 제대로 즐기지 못한 채 한참을 통화하다 방으로 돌아왔다. 나를 아는 누군가가 당시의 내 모습을 봤다면 제법 웃었을 것이다. 어깨 위로는 누가 봐도 일을 하는 듯 심각한 표정으로 전화를 받고 있는데, 가슴 아래로는 온통 물에 잠겨 화려한 휴양지용 수영복을 자랑하고 있었으니까.

필리핀까지 와서 업무를 처리하고 나니 허기가 몰려왔다. 나는 호화스럽게도 룸서비스를 시켜 먹었다. 잔뜩 지친 상태로 스위트룸 소파에 앉아 피자를 먹고 있자니 뒤늦게 회의가 몰려들었다. 분명 일 생각 없이 푹 쉬기 위해서 여기까지 온 것 아닌가. 잠시 일을 미뤄둘 수도 있었는데, 양해를 구할 수도 있었는데. 나는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돈 욕심은 아니었다. 나를 바쁘게 만드는 것 중 8할은 비영리 활동 업무였다. 수영장에서 받았던 전화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나는 그냥 일을 좋아하는 사람인 걸까? 그것만으로는 충분한 이유가 될 것 같지 않았다. 내가 지쳐있는 상태라는 걸, 누구보다 내가 잘 알았으니까.

피자에 이어 감자튀김을 질겅질겅 씹으면서, 나는 새로운 결론을 내렸다. ‘내가 없어도 세상은 너무나 잘 돌아간다. 그러나 나는 아직 그 사실을 온전히 인정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 내가 며칠 정도 핸드폰을 끄고 에메랄드빛 바다에서 헤엄만 친다고 해도 그리 많은 것이 변하지는 않을 거라는 당연한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나의 일 중독 증세는 결국 나만을 위한 것이며, 그게 결국 나를 해칠 거라는 것도.

한국에 돌아온 뒤, 팀원들은 내가 언제 자리를 비웠냐는 듯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리고 나는 두 번 다시 휴양지에 가지 않았다. 대신 피곤할 때면 미련 없이 책상 앞을 떠나고 차 한 잔을 마시기 위해 기꺼이 시간을 낭비하는 습관을 들였다. 세상은 쉴 새 없이 돌아간다. 내가 노트북 앞에 앉아 코피 흘릴 정도로 일할 때도, 해먹에 누워 하염없이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때도. 나 없이 돌아가지 않는 세상은 없다. 언젠가 다시 휴양지에 가게 된다면, 그때는 기어코 핸드폰을 어딘가 보이지 않는 곳에 던져두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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