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마다의 구원
‘악’이 뭐라고 생각해? 저녁으로 시킨 피자를 먹으려는데, 케이가 물었다. 엄청 어려운 질문인데. 나는 핫소스를 뜯으며 그에게도 뿌릴 것인지 물었다. 그는 절대 뿌리지 말라며 고개를 젓고는 다시 자신의 이야기로 돌아갔다. 오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목사님이 묻더라. 종교적인 질문인가. 그런 건 아니고. 그래서 목사님은 뭐라고 하셨는데?
케이는 아무것도 뿌리지 않은 페퍼로니 피자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나도 핫소스를 뿌린 피자를 먹었다. 입 안의 내용물이 사라질 때까지 탁자 위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의’를 잘못 사용하는 게 ‘악’이래. 그래서 우리가 아는 의인들은 사실 다 화난 사람들이래. 정당하게 분노하고, 올바른 곳에 분노를 표현한 사람들을 의인이라고 부른다고. 그러지 못한 사람들은 똑같은 감정을 가져도 죄를 짓게 된다면서, 감정 자체에 옳고 그름이 있는 게 아니라고 하셨어.
그럴 듯하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케이는 동의를 구하듯 한 번 물어보고, 그런데, 라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정의로운 사람이 된다는 게 훨씬 어렵게 느껴지더라고. 케이는 금세 피자 한 조각을 다 먹어버리고는 두 번째 조각을 집어 들었다. 그는 언제나 나보다 밥 먹는 속도가 빨랐다. 나는 손에 남아있는 조각을 마저 입에 넣고, 집어 갈 피자에 핫소스를 뿌렸다.
아예 화를 내지 않는 것보다 올바르게 화를 내는 게 더 어렵다는 건가. 맞아. 케이는 피자와 함께 사온 콜라를 자신의 컵에 부었다. 하얀 거품이 소리를 내며 부풀어오르다 이내 가라앉았다. 분노도 원망도 슬픔도, 마냥 넘겨버려서는 안 된다는 거니까. 거품이 사라진 콜라가 오늘따라 유독 검게 보였다. 올바른 쓰임을 찾지 못한 감정도 죄가 될까.
교회가 싫다는 친구를 만난 적이 있다. 대수롭지 않게 이유를 물었더니, 태어날 때부터 사람을 죄인 취급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교회를 다니지 않았어도 한번쯤 들어보았을 이야기.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에 선악과를 훔치므로 생긴 원죄(原罪)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는 단지 태어난 것뿐인데 자신이 짓지도 않은 죄를 품고 사는 건 부당하다고 했다. 그러면 삶 자체가 벌이 되는 게 아니냐고, 그런 기분을 느끼며 사는 게 억울하다고 했다. 나는 쉽게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설득을 해야 할까 설명을 해야 할까. 철학이나 종교적 교리를 따지고 든다면 훨씬 다채로운 논의가 나올 수도 있었지만, 나는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친구의 이야기가 논리나 사실보다는 감정에 대한 것이라 느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가 느끼는 억울함을 이해해보려 했다. 누구라도 죄인 취급을 받으면 기분이 나쁠 것이다. 삶에 최선을 다할수록, 남에게 폐 끼치지 않으려 노력할수록 그런 억울함은 더 커질 것이다. 쉽지 않은 하루를 보낸 자신에게, 아무런 관련도 없어 보이는 누군가가 나타나 소리치는 것이다. 너는 잘못하고 있다고. 죄를 짓고 있다고. 그러니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말이다.
돌이켜보면 최근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갈등도 대부분 그런 죄책감과 관련되어 있었다. 누군가는 ‘잠재적 범죄자’라는 말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고, 스쿨존 교통사고에 대한 처벌을 강화한 이른바 ‘민식이법’이 운전자들을 억울하게 만드는 법이라며 증오를 쏟아냈다. 출근시간 지하철에 진행된 장애인 단체의 이동권 시위에는 왜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은 시민에게 피해를 끼치냐며 싸늘한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그 안에도 분명 훨씬 더 복잡하고 다채로운 맥락이 있었지만, 감정은 언제나 그 모든 것보다 앞섰다.
나는 가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상대방을 이해해보려 애썼다. 친구에게 그랬던 것처럼 논리나 사실을 잠시 제쳐둔 채 그들이 느끼는 감정에 집중해보려 했다. 그러면 조금이나마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감정은 억울하게 뒤집어 쓴 죄를 발견하는 순간, 자신을 향한 원죄(原罪) 앞에서 가장 크게 부풀어올랐다. 그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몰랐다. 감정 자체에는 옮고 그름이 있는 것이 아닐 테니까.
하지만 그들이 감정을 해소하는 방식까지 이해하냐고 묻는다면, 단호히 고개를 저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억울하게 만드는 방식 그대로, 타인을 죄인 취급하며 감정을 해소했다. 나를 억울하게 만드는 모두를 ‘페미년’으로, ‘감성팔이 떼법’으로, ‘불법 시위 범죄자’로 여기며 분노를 쏟아냈다. 그리고 자신이 정의로운 일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 자신의 분노는 정당하다고, 그러니 누군가를 다시 억울하게 하거나 상처 입혀도 된다고 믿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묻고 싶었다. 감정의 방향과 대상만 바뀐다면 부당하다고 느끼던 ‘악’이 마땅히 바른 ‘의’가 되는 건지, 당신의 ‘의’는 누구를 구하기 위해 필요한 건지 묻고 싶었다. 감정을 이해하려는 만큼 뒤늦게 따라오는 논리와 사실에 동의할 수 없었다. 이런 방식은 원하든 원치 않든 더 많은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 것이다, 결국 똑같은 죄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할 것이다. 하나님도 아니고, 최초의 인류도 아니고, 서로가 서로를 죄인으로 만들고 벌을 내리는 세상. 저마다의 정의로 가득한 세상. 올바른 쓰임을 찾지 못한 감정이 죄가 되는 세상을 말이다.
어쩌면 정말로 부당한 건 모두가 죄인이 되는 거대한 ‘악’의 굴레일지도 몰랐다.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어떠한 ‘의’도 바른 방향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니 나는 이해해보려는 것이다. 때때로 나를 괴롭히는 감정을, 분노나 원망이나 슬픔을, 당신을 이해하는 데 사용해보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감정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복잡하고 다채로운 맥락으로 나아가자 말하고 싶었다. 구원이 있다면, 적어도 자신의 ‘의’를 돌아보는 그 맥락 너머에 있을 것 같았다.
남은 건 내일 아침에 먹자. 세 조각 째 피자를 마저 먹은 케이가 말했다. 그러자. 마찬가지로 세 조각을 먹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런데, 라고 말을 이었다. 너는 정의로운 사람이 되고 싶어? 아니. 그는 의외로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러면 뭘 고민하고 있었던 거야? 아, 그거? 케이는 별거 아니라는 듯 웃으며 컵에 남아있던 콜라를 마셨다. 그냥 어려운 일이라는 건 알고 있어야지 싶어서. 스스로 의롭다고 확신하는 게 제일 무서운 거 아니겠어?
우리는 남은 피자를 덜어내고 탁자를 치웠다. 얼마 남지 않은 콜라의 뚜껑을 닫아 냉장고에 넣으면서 나는 탄산이 새어나오듯 피식, 하고 웃었다. 늘 그랬다. 케이는 언제나 나보다 빨랐다. 너는 이미 자신을 구했다. 그가 작업 중이던 그림을 마무리하러 방으로 들어가고, 나도 책상에 앉았다. 저마다의 믿음만큼, 저마다의 십자가가 있을 거라 생각하며, 그 십자가의 개수만큼 저마다의 구원이 있을 거라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방안으로 스며든 도시의 그림자가 오늘따라 유독 검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