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 길을 걷네. 10] 수라, 아수라…… 아, 수라繡羅 !

일러스트=강동현

 
“오늘 집에 있냐? 시장에서 생선 몇 마리 사 보냈으니 잘 받아서 두고 먹어라”

엊저녁에 마산 언니의 전화를 받았는데, 오후 2시에 생선 상자가 문 앞에 도착했다. 반건조 고등어 2손과 미끈한 뾰족조기 3마리가 왔다. 나의 입안에 짭조름한 물결이 출렁댄다.

부엌에 소금과 젓갈이 없는 찬장(냉장고)을 생각할 수가 없듯이, 나는 김과 생선이 없는 식탁을 생각하기 어렵다. 바쁘고 귀찮아서 며칠간 간편하게 밥을 때우다 보면 어김없이 짭잘한 생선의 깊은 맛이 그립다. 뜨끈한 미역국에 된장찌개, 조상 때부터 한국인의 입맛을 이어온 김치와 장류도 바다에서 온 소금으로 시작된 것이다. 생명의 시작이고 근원인 바다! 그 성스러운 바다에 심각한 일이 일어날 것 같다. 2011년 3월 11일 닥쳐온 지진과 쓰나미로 세계 최고라는 일본 기술로 지은 후쿠시마에서 핵발전소 사고가 나버렸다. 이후 12년을 모은 고준위 핵 원료와 핵 폐수 독극물을 바다에 풀어내겠다고 벼르고 있다.

일본과 IAEA가 손잡고 후쿠시마 핵 폐수 방류 준비를 차근차근 진행하고 있을 즈음, 나는 황윤 감독이 찍은 새만금 갯벌 생태기록단의 활동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수라>를 보았다. 돈을 노리는 인간의 셈법으로 새만금 방조제 둑을 쌓고 갯벌의 생명을 목조일 때, 새만금 갯벌 생태기록조사단이 탄식하며 함께 있었다. 4대 종단 수행자와 시민들이 세 걸음마다 한 번씩 엎드려 참회의 기도를 하면서 전국을 걸어왔지만, 끝내 새만금 하구에 33.9km의 물막이 매립공사가 완료되었다. 더 이상 바닷물이 들어오지 않은 채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시간이 흘렀다. 갯벌 생물들의 숨이 끊어지려는 최후의 시간들.

‘오늘은 물이 들어올까?’
‘오늘은 물이 들어올까?’
구조단이 와주기를 기다리는 조난자들처럼 뻘 속의 조개와 생명들은 깊은 곳에 숨어들어 바닷물을 기다리고 있던 차, 말라가던 뻘밭에 비가 내렸다. 뻘 속으로 조금씩 물이 들어오자 조개들이 바닷물인 줄 알고 마지막 숨을 헐떡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하늘을 우러러 입을 벌렸다. 그러나, 그 물은 바닷물이 아닌 빗물이었다. 구조대인 줄 알고 두 팔 벌려 맞이한 상태로 총을 맞은 사람처럼, 입을 벌린 채 하얗게 죽어버린 수십만 개의 조개들이 하얗게 묘지가 되었다. 조개들의 최후자세를 지켜본 활동가 오동필 씨는 끝내 눈물을 내비치고 말았다.
 

새만금 방조제는 몇 명의 대통령이 바뀌어갈 동안 끝없는 환경파괴 논란이 이어졌다

 
카메라가 몇 군데 장소를 옮기기도 전에 내 눈에서 눈물이 배어 나왔다. 인간만이 영물이 아니다. 지금 후쿠시마 앞바다에서 물고기와 해조류, 작은 생명들은 얼마나 불안에 시달리며 떨고 있을까 생각하니, 무력한 육지 인간인 내 몸도 함께 떨려오기 시작했다. 암울한 재앙의 예감에 몸부림치고 있을 물고기들과 해조류들이 얼마나 울고 있을지, 그들의 울음이 내 몸으로 전해져 오는 것만 같았다. 이제 곧 쏟아져 나올 핵 폐수를 따라 세슘, 삼중수소, 스트론튬, 아이오딘… 등 수십 가지 핵종이 바닷속 그들의 몸속에 스며들어 쌓일 텐데 이 일을 어쩌나….. !

나는 최근 일종의 우울과 말세적인 공황 상태에 사로잡혀 있다. 후쿠시마 핵폐수 해양 방출이라니, 이것은 소금과 바다생물의 목숨을 노리고 인류의 미래를 저당 잡히는 반영구적 테러며, 돌이킬 수 없는 죄업이 아닌가. 오염수를 영원히 뿜어댈 수 있도록 파이프관을 허락할 것인가, 말 것인가? 단 한 번이라도 핵 폐수 방류를 허용한다면, 이것이 선례가 되어 핵발전소를 가진 다른 나라들이 줄줄이 핵 찌꺼기 방출할 것이고 바다는 인간이 발명한 최악의 물질 핵 찌꺼기에 의해 죽음에 이를 것이다. 하늘과 땅이 갯벌에서 만나듯, 동일본 바다와 우리나라 동해, 태평양이 모두 이어져 있는 것처럼, 인간도 바다 생명도 한 다리만 건너면 서로 목숨이 이어져 있는데 말이다.
 
화면 속에 기록된 새만금 방조제 안에서 죽어간 생명들과 이제 죽어갈 바닷속 생명들이 고스란히 내 안에서 소리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생명보다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핵발전소와 IAEA, 자본의 논리에 복무하는 과학자들, 그들은 정녕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짓을 하면서도 불안을 못 느끼는 것일까? 생명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수성과 위험한 앞날에 대한 불안의 감각을 잃은 인간이 과연 호모 사피엔스일까?

나 자신도 갯벌 살리기 운동에는 나서보지 못했지만, 끔찍한 핵 폐수 방류를 눈 뜨고 당할까 봐 몹시도 불안하다. 이렇게 숨 막히는 하루하루를 지내다 보니,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2005년 대구와 부산 사이의 고속철도 개설을 위해 천성산 터널을 뚫을 때, 도롱뇽의 서식지가 파괴될까 봐 잠을 못 이룬 채 단식투쟁에 들어갔던 사람, 지율스님이다. 그때만 해도 나는 지금처럼 불안하지 않았었다. 함께 걱정하고 반대하던 친구들과 내성천에 달려가 활동가 몇 분과 스님을 만나고 온 것이 다였다.

2006년 3월, 대법원이 환경단체와 농어촌개발공사의 소송에서 정부 측의 승리로 판결을 내리자 끝내 물막이공사가 완료되고 말았다. 그러나 활동가들은 갯벌을 포기하지 않았다. 계화도 갯벌, 해창갯벌, 수라 갯벌을 오가며 바다를 위로했고, 기다렸다. 살아남은 생명이 있는지, 생물들이 어떻게 죽어가는지, 갯벌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살피고 기록했다. 새만금 갯벌에서 쉬어가던 철새들은 또 얼마나 줄어드는지, 그들이 와서 아름다웠던 하늘이 얼마나 달라져 가는지도 ….
 

영화 <수라> 스틸컷

 
아름다웠던 쇠제비갈매기와 가창오리들의 군무는 무대 위에서 춤추는 사람들의 춤과는 차원이 달랐다. 긴 시간 대륙을 오가는 새들의 이동은 광활한 지구의 주민이 인간만이 아님을 알게 했고, 인간을 에워싼 드넓은 자연환경에 대한 자각, 다른 종과 이어진 열린 생명 의식을 갖게 해 주었다. 바람 소리만을 배경으로 하는 이 아름다운 영상은 영화예술이 주는 인위적인 편집 기술을 걷어내고 맨눈으로는 닿을 수 없는 바다 위의 창공으로 나를 데려가 주었다. 하늘 위의 바람길을 따라 먼 대륙을 이어주는 수십 만 마리 철새들의 춤은 인간 중심의 근시안적인 마음을 한없이 크고 시원하게 열어 주었다. 인간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동작, 비행하는 생명체로서의 새들의 생명도 아름답고, 카메라 앞에 나타난 검은 뻘 속에 깃든 갯벌 생명들도 아름다웠다. 그들은 하늘과 땅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갈 경이로운 친구들임을 알게 해 주었다.

“너무 아름다운 광경을 본 것도 죄라면 죄가 되는 걸까?”

활동가 오동필 씨는 묻는다. 아름다움을 목도한 자는 평생 그 아름다움을 그리워하는 벌을 받는 것일까? 다시는 갯벌을 떠나지 못했다. 활동가 오동필 씨, 에코페미니스트 영화감독 황윤도 군산에 내려와 살게 되었다. 그들을 따라 아이도 자라고, 함께 갯벌을 관찰하러 다녔다. 농어촌개발공사와 정부가 기세 좋게 몰아붙이던 새만금 간척 사업은 시민단체 환경지킴이 예술가들과 번번이 부딪쳤다. 새로운 농지를 조성한다는 계획은 탁상공론에 불과했다.
 
2006년 마지막 물막이 공사 이후, 죽음의 14년을 지나서 2020년부터는 하루에 두 번 바닷물 유입이 허락되고 있으며 생물들이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했다. 개발주의자들에게서 지워져 가던 수라 갯벌도 기적처럼 이름을 되찾아 살아나고 있다. 갯벌을 걷고 기록한 수많은 활동가가 회한과 감동의 눈물을 뿌린 덕분이다. 죽음의 14년 동안 겉모습이 황폐하게 바뀌어 가도 그들은 그곳을 ‘갯벌’로 호명해 왔다. ‘갯벌’이란 이름으로 부르고 함께 있어야 언젠가 때가 되어 갯벌로 복원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뭇 생명을 품은 ‘갯벌’은 다시 ‘수라繡羅’ 갯벌로 돌아오고 있다. 흰발농게가 하얀 집게발을 힘차게 움직이며 구멍 속을 들락거리고, 작은 생물들과 해초들이 꼼지락거린다. 사람들이 지켜낸 수라 갯벌은 다시 사람과 생물, 새들의 날갯짓과 빛을 품을 것이다.

인간들은 이만하면 잘살고 있지 않은가! 아니 너무 많은 부끄러운 짓을 일삼고, 너무 배부르게 살고 있지 않은가? 얼마나 더 땅을 망치고 하늘을 망치고 바다를 망쳐야 정신이 들 것인지? 자연의 신음을 외면한 채 정신을 홀리는 쾌락과 인공조명, 3D 컴퓨터 그래픽에 길든 인간들이여! 자본의 꿀맛에 길들여진 가짜과학자와 포스트 휴먼들이여!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핵발전소를 멈추고 그 찌꺼기는 철저히 봉쇄해서 지하 2500m에 묻어야 할 것이다. 바람과 흙과 물의 소리에 민감하게 귀 기울이는 존재가 되어보자. 만약에 우리가 바다를 향해 죽음의 문을 여는 일본 정부의 조력자가 된다면, 태평양에 사는 수천, 수억의 해룡이 일어나 다시 한번 일본을 덮치고, 한국을 삼키려고 올지도 모를 일이다.

오늘 우리 집에서 하는 독서 모임의 식사 메뉴는 반건조 고등어구이다.
언니 잘 먹을게요. 바다의 용왕님, 힘내세요!
 

글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