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바로크

 
2023년 6월 28일, ‘만 나이 통일법’이 시행되었다. 덕분에 우리는 적어도 1살, 많으면 2살까지 나이가 감소했다. 물론 신체 나이는 변하지 않을지라도, 숫자로나마 나이가 줄어들었다는 점 때문에 주변에서 기분이 좋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필자 또한 아직 20대를 더 길게 보낼 수 있다는 사실로 인해 내심 기뻐했다.

그러다가 문득 성소수자에 대한 이슈가 떠올랐다. 생물학적으로 남성(또는 여성)으로 태어났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성 정체성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성을 재정의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심지어 남녀 이분법을 벗어나 이른바 ‘제3의 성’ 정체성을 법적으로 용인해야 한다는 이들도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국가에서 <생물학적 성별> 이 아니라, <사회적인 성별>을 인정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그렇다면 언젠가 내 나이가 20대를 벗어나 중년을 거쳐 노년이 되었을지라도, 내가 나 자신을 ‘사회적으로’ 20대라고 생각한다면, 국가에서 나를 20대라고 인정해달라고 요구하는 상황도 상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생물학적 성별을 부정하는 이들 중에는 아직 “나이 또한 생물학적으로 정해지는 게 아닌, 자신의 정체성에 따라 내 스스로 정할 수 있어야 한다” 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없다. 아마도 그들 역시 이 주장이 터무니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생물학적 성별을 부정하는 것은 이와는 달리 합리적이라고 볼 수 있는가? 물론 자신이 남성으로 태어났다고 할지라도 호르몬, 유전, 가정환경 등에 의해서 성 정체성에 혼란이 오는 사람은 적지 않다. 그들 역시 인격자로서 대우받아야 마땅하지만, 생물학적인 사실을 제도적으로 부정한다면 그것은 별개의 문제다.
 


 
과학과 제도의 대결

인간으로서 가지는 선천적인 특성과 과학의 공통점은 국경이 따로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제도와 법령은 각 국가나 지역의 체제, 시민의식, 윤리 등을 반영한다. 이들이 서로 충돌한다면 좋든 나쁘든 여러 분야에 혼란을 가져온다. 인과관계가 뚜렷한 자연과 과학의 영역을 제도를 통해 인위적으로 막고, 변형시키고, 왜곡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같은 시도로 인해 제도와 과학이 충돌했던 사례는 역사적으로도 굉장히 많다.

인류는 문명을 이룬 이후 꾸준히 과학을 발전시켜 왔지만, 제도나 사회적 통념에 의해 진리가 가려지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15~16세기에 있었던 천동설과 지동설의 대립은 종교적 권위와 과학 간의 대결이었다. 이 당시에는 과학이 도전자였고, 많은 희생 끝에 과학이 승리를 거두었다. 그렇다면 이후의 대결에서는 과학이 계속 승리했을까?

근대에 이르러서는 제국주의 및 인종차별주의 논리와 결합한 ‘우생학’이 등장했다. 물론 자기 민족이나 인종 등의 우월함을 증명하고자 하는 비과학적인 시도는 수천 년 전부터 있었다. 예를 들어 인도의 ‘카스트 제도’, 혹은 스파르타처럼 약하거나 장애인으로 태어난 아이들을 가차없이 내다 버린 사례가 있다. 그러나 고대뿐만이 아니라 근대에 이르러서도 우생학처럼 과학이 패배할 수 있다. 즉, 제도와 과학의 대결에서는 어느 한 쪽의 승리를 섣불리 장담할 수 없다.
 


 

페미니즘 운동

 
<좋은 가치> 또한 과학과 충돌할 수 있다.

“인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라고 묻는다면 십중팔구는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 혹은 ‘매우 중요한 것’ 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내가 현재 근무하고 있는 북한인권정보센터 역시 북한주민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다. 인권을 지켜야 한다는 목소리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가치가 과학과 대립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 앞서 말한 ‘과학과 정치의 대결’에서는 ‘비도덕, 비이성’과의 대결 구도인 것처럼 묘사했지만, 현재는 ‘선의(또는 그렇게 보이는 위선)’와 과학의 새로운 대결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정확히는, ‘올바름’ 자체가 아닌, 그것을 지키기 위한 여러 무분별한 시도가 과학과 충돌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학문이 바로 ‘여성학’이다. 여성학은 굉장히 이질적인데, 학문에 속하면서도 편향성(Bias)을 인정한다. 그러다보니 다른 사회과학에서는 결코 불가능할 행위가 허용되는데, 바로 “여성은 ‘사회적으로’ 억압당해 온 대상”이라는 전제하에 사회 현상을 분석하는 것이 허용된다. 무슨 말이냐면, 가설과 현실이 다르면 가설을 수정해야 함이 과학적으로 마땅한데, 여성학은 그 반대로 현실을 수정하려 드는 학문이다. 그러다보니 어처구니없는 주장이나 논문이 자주 탄생하지만 여성학에서는 이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인터넷 방송인 ‘보겸’이 자신의 별명을 딴 유행어(보이루)가 여성 혐오와 억압의 산물이라고 주장한 논문이 학술지에 등재된 사건이 대표적이다.

이는 한국뿐만이 아니다. 직업에서 남녀 비율이 크게 차이가 나는 현상이 오히려 제도적으로 성 평등을 보장하는 국가들에게서 더 자주 나타나는 현상이 관측되었다. 이는 여성계의 기존 주장(여성 간호사가 많거나, 남성 공대생이 더 많은 것은 여성 억압의 산물이다.)을 반박하는 현상이며, 여러 과학자들은 남녀가 “생물학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이 발생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특히 가장 성평등 제도가 가장 활성화된 노르웨이의 한 다큐멘터리는 이와 같은 ‘성평등의 역설’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는데, 여기에서는 남성/여성호르몬에 의한 성격 및 직업 선호에서 차이가 난다는 과학적 연구결과를 노르웨이의 여성학자가 끝내 인정하지 못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인권’이라는 가치를 지키려는 ‘선의’ 역시 과학과 충돌할 수 있다. 어쩌면 이전의 사례들 역시 선의와 과학(중립)의 충돌일 수 있다. 종교와 과학의 전쟁은 하나님의 숭고한 말씀을 담은 성경 구절을 지키려는 ‘선의’에서, 제국주의 질서가 과학을 패배시킨 것은 다른 국가와의 경쟁에서 낙오되지 않고 식민지를 건설해 국가와 국민을 부강하게 하려는 ‘선의’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최근 넷플렉스에서 공개한 ‘퀸 클레오파트라’ 역시 그렇다. 제작진들이 클레오파트라를 흑인으로 둔갑시킨 것이, 설마 그들이 이를 악물고 역사를 왜곡해주겠다는 악의에서 비롯된 것이겠는가.
 


 

성소수자 운동

 
정치의 역할 : 이성과 신념으로 길을 밝혀야

미국, 캐나다 등 여러 서방 국가에서는 법제화를 통해 기꺼이 과학과 제도의 정면 충돌을 감수하는 움직임이 있다. 그 결과 소위 LGBT라고 불리는 집단의 인권이 법적으로는 상승했을지는 몰라도, 이로 인한 여러 부작용들이 들려오고 있다. 고작 유치원생 정도 되는 아이들에게 같은 성별의 부모를 보여주며 기초 성교육에 혼란을 야기하거나, 여성부 스포츠 경기에 트렌스젠더가 출전하여 신기록을 갈아치우거나, ‘성 중립 화장실’을 만들었더니 그곳에서 신종 성범죄가 발생하는 등 온갖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부작용을 최소화시키기 위해 제도화를 신중하게 검토하고 결정해나가는 것이 정치가의 역할이지만, 오히려 그들은 스스로를 자화자찬하며 이러한 혼란을 부추기고 있다.

한국에서는 지금 ‘후쿠시마 오염수 처리 논란’ 에 대해서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다. 국민의힘은 국제원자력기구 (IAEA)를 비롯한 연구결과를 근거로 오염수 방류에 대해 관대한 입장을 보이는 한편, 민주당은 오염수로 인해 해양 생태계가 붕괴될 것이라며 결사 반대를 외치고 있다. 이미 민주당은 과거에 광우병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고, 사드 전자파로 인해 참외가 상하고 몸이 튀겨진다는 등의 근거 없는 선동을 일삼았기 때문인지, 적어도 예전처럼 그들의 호소력이 크게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흥미로운 사실은 문재인 정권 당시의 국민의힘 역시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를 반대했다는 것이다. 특히 지금 가장 앞장서서 오염수 방류를 찬성하는 사람 중 한 명인 국민의힘 성일종 의원은 정작 2020년 10월 19일 비상대책회의에서는 “오염수가 누출되면 우리나라가 직접적인 피해에 노출된다”며 반대했었다. 반대로 당시 문재인 정부의 정의용 외교부 장관은 2021년 4월 대정부질문 답변에서 “IAEA 기준에 따른다면 굳이 반대하지 않는다”고 밝혔고, 이전 강경화 외교부 장관도 “후쿠시마 오염수, 일본의 주권적 영토서 이뤄지는 사안”이라고 언급하는 등 관대한 입장을 보였다.

지금 민주당이 IAEA 기준조차 믿을 게 안된다며 반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렇기에 오염수 방류 논쟁은 과학적 근거에 기반한 것이 아닌 신념과 용기, 책임의식의 부재로 인한 현상이며, 이는 제도와 정책을 결정하는 데 과학적인 요소가 그들에게는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기에 생기는 문제이다.

국민들이 정치가에게 진정 원하는 것은, 과학자들처럼 모든 사안에 확실한 근거와 적절한 데이터를 제시하여 효율성 있는 정책을 수립하라는 정도까지는 아닐 것이다. 때로는 약자 등을 위해 효율성과 합리성을 희생해서라도 반드시 유지하거나 해내야만 하는 영역도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진영 논리와 확증 편향, 그리고 특정 집단의 표를 의식한 나머지 최소한의 상식이나 과학적 시각을 잃지 않는 선에서 정치가는 과학과 제도와의 관계를 조율해야 할 것이며, 이는 이성과 신념을 바탕으로 그들이 직무에 임해야 비로소 가능하다.

정치는 과학의 적이 되어서는 안 되며, 과학과 함께 이성의 척도로 우리 사회의 어둠을 밝혀야 한다.
 


 
참고문헌
Maddy Savage, The ‘paradox’ of working in the world’s most equal countries, 《BBC》, 5th September 2019
Mac Giolla, E., & Kajonius, P. J. (2019). Sex differences in personality are larger in gender equal countries: Replicating and extending a surprising finding. International Journal of Psychology, 54(6), 705-711.
Patricia Im, The Gender Equality Paradox – Norway Documentary, 《NRK》, 2011
Lippa, R. A. (2010). Sex differences in personality traits and gender-related occupational preferences across 53 nations: Testing evolutionary and social-environmental theories. Archives of sexual behavior, 39, 619-636.
이은지 등, 후쿠시마 오염수 논란에 대한 우리 언론의 보도 양태, 《열린라디오 YTN》, 2023. 06. 05.
김지은, 정의용 “일 오염수 방류, IAEA 절차 따른다면 반대할 건 없다”, 《한겨레》, 2021, 04, 19

글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