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을 통해 정치인을 만들 수 있을까?

플라톤의 교육관으로 살펴보는 훌륭한 정치인의 모습
 

일러스트=바로크

 
『국가』 전편을 통해 플라톤은 위정자의 교육과 훈련에 대하여 대단히 많은 비중을 두고 논의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사회의 지도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좋은 위정자로서 정치를 잘 수행하는 데에 필요한 덕과 자질을 갖출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교육이다. 그런 만큼 교육은 기본적으로 위정자들의 영혼적 발전에 관련이 있는 일이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교육은 영혼과 관련된 차원의 깨달음과 훈련을 의미하는 것이다. 교육의 의미를 단순한 지식이나 정보의 취득, 또는 기술이나 요령의 연습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현대적 의미의 용례와는 차이가 있는 개념이다.

플라톤은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선하는 것이 덕성이라고 보았다. 덕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절제, 용기, 지혜, 정의의 네 가지 덕목을 체득하여야 한다. 이러한 교육의 첫 번째 단계로 우선 플라톤은 모든 어린이들이 반드시 받아야 하는 일종의 초등교육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다. 그 교육은 육체적 단련을 위한 체육 과목과 정신적 양육을 위한 음악 과목으로 구성된다.

음악 교육의 목적은 정념을 다스릴 수 있도록 단련하는 것이다. 유년기의 어린이들이 뛰어놀 때 다소 거칠고 시끄러운 것은 일반적인 사실이다. 음악 교육은 그런 아이들에게 질서를 부수는 일탈의 충동을 통제할 수 있도록 박자와 화음을 가르쳐 줌으로써, 조화 가운데에서도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고자 하는 것이다. 음악은 가사와 음률 또는 곡조로 이루어지는데, 가사를 통해 이뤄지는 유년기 어린이들에 대한 교육은 신들과 영웅들의 우화를 이야기 해주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런 신화적인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목적은 아주 어린 나이 때부터 올바른 것에 대한 사랑을 아이들의 마음에 싹트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은 아이들에게 음악 교육을 하는 데에 있어서 그 당시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유행했던 호메로스 스타일의 서시사들을 사용하는 것에는 가장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플라톤의 관점에서 볼 때, 범신론적 세계관에 의거하고 있는 호메로스적인 신화들은 신들이나 인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혼란스러운 정경만을 담고 있었다. 호메로스나 헤시오도스가 지은 서사시들에서 등장인물들은 종종 기만적이며, 자주 다른 등장인물들과 음모나 싸움에 휘말리기도 하며, 죄악을 저지르는 데에 거리낌이 없고,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변장이나 변신으로 다른 이들을 속인다.

호메로스 스타일의 서사시에서는 이처럼 등장인물들 간의 혼란스럽고 난잡한 관계뿐만 아니라, 상상을 초월하는 악행을 상정함으로써,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그다지 중시하지 않는 태도를 보인다. 플라톤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런 세계관은 인간 영혼의 고결함을 바로 보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영혼에 대한 바른 관점이 전제되지 않는 상황에서 진정한 정치적 질서의 확립은 불가능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플라톤은 아이들에게 호메로스나 헤시오도스의 저작들을 가르치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또한 그리스 사회에서 영혼에 대한 관점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놓고 있는 서사시, 그리고 그러한 서사시들을 쓴 작가들을 비판하였던 것이다.

플라톤 자신이 종종 시를 썼기 때문에, 시와 작가들에 대한 그의 이러한 비판 내지는 적의가 일면 의아스럽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문학 자체에 대한 적의가 아니라, 당대 그리스 사회에서 널리 유행하던 서사시들 속에 담긴 그릇된 가르침이 아이들에게 노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바로 이 부분과 관련하여, 플라톤이 이를테면 ‘사전 검열’을 거친 후 자신의 입맛대로 허용한 것만 아이들에게 읽히고 들려주기를 바랐던 것이라고 하면서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칼 포퍼이다. 포퍼를 비롯한 현대 철학자들이 플라톤의 생각에 대해서 ‘사전 검열’을 합리화 하는 사상적 기초를 제공했다고 비판했던 것에는 20세기 전반에 등장했던 나치와 소비에트 등의 전체주의 정치체제의 잔악한 행위에 대한 인류의 반성을 촉구하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20세기 전체주의 사상가들은 자신들의 철학을 완성하기 위해 플라톤을 즐겨 인용하였다.

어떤 종류의 문학 서적이 교육에 사용되려면 그에 앞서 그 서적이 교육에 적절한지 판단할 수 있는 어떤 이성적 기준이 세워져야 한다고 플라톤이 생각했던 것은 사실이다. 플라톤이 살았던 시대로부터 2천4백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대부분의 학부모와 교사들은 어떤 종류의 이야기들이 아이들에게 들여져야 하고, 어떤 종류의 서적들이 읽을거리로 제공되어야 하는지에 관해 어떤 기준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암묵적인 동의가 있다.

오늘날의 이런 필요성과 플라톤의 관점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플라톤은 무엇이 진리인지를 이성을 통해 알 수 있다는 관점에서 교육의 원칙 또한 세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플라톤은 이러한 생각을 일관되게 자신의 논의에서 적용하고 있다. 아이들에게 적절한 서적들이 무엇인지를 선택해서 읽히고자 하는 과정을 ‘검열’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이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혼동하고, 문제를 곡해하는 것이다.

만일 아이들에게 읽게 하거나 들려주거나 할 책을 고르는 데에 있어서 어떤 기준이 필요하다고 한다면, 부모나 교사는 어떤 이야기를 어떤 기준에 의해서 아이들에게 들려줘야할 것인가? 그리고 어떤 문학 서적이 그들에게 읽을 수 있도록 허용되어야 하는가? 이런 것들에게 관한 기준을 세우지 않고 아이들에 대해 교육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과연 그렇게 기준을 세우고 고르는 것을 검열이라고 할 수 있는가?

절제되고, 용감하고, 지혜롭고, 정의로운 영혼을 가지고 한 사람의 훌륭한 인간, 나아가 국가를 위한 훌륭한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려서부터 ‘적절한 신학’에 기초한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 바로 플라톤의 신념이다. 여기서 신학이란, 기독교적인 신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신들에 관한 논의를 뜻한다. 적절한 신학에 관한 플라톤의 논의는 플라톤 정치철학의 원칙을 구성하는 것으로서, 플라톤의 절대적이고 완벽한 이데아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진정한 인간성은 진정한 신성을 필요로 한다. 달리 말하자면, 인간의 본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반드시 만물의 기준으로서의 신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신들에 관한 당대 유행하던 서사시의 잘못된 가르침을 참된 것으로 바로잡고자 했다. 플라톤은, “신은 확실히, 그리고 그의 모든 속성은 하나도 빠짐없이 가장 좋은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플라톤에 따르면, 아름다움이나 덕성에 있어서 신에게 뭔가 결핍된 것이 있고, 신이 외형이나 태도를 자주 바꾸고, 또 인간을 속인다면, 그것은 신일 수 없다. 그러므로 플라톤은 신을 전지전능한 절대자로 묘사해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신의 속성에 관한 논의를 전개하였다.
 

 
신은 완전하며, 그렇기에 신은 악의 근원이 아니고, 오직 선의 근원일 뿐이다. 신은 변화하지 않으며, 자신의 본모습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거짓되지 않으며, 아름다움의 근원이고, 유일한 존재이다. 신은 인간이 바치는 공물에 의해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신이 악의 근원이 아니므로, 악의 근원이 무엇인지 인간들은 살필 필요가 있다. 신의 존엄성을 존경하면서 자기 행동에 대한 인간 스스로의 도덕적 책임에 대해 논의하고자 하는 것이 플라톤이 ‘적절한 신학’에 대해 언급하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는 인간의 도덕적 책임과 관련하여 신성과 인간성의 관계를 규정짓는 두 가지 명제가 있다. 그 중 하나의 명제는 파르메니데스에 의해 제기된 것으로, “신이 만물의 척도”라고 하는 것이다. 유일하고 변화하지 않으며 보편타당한 것은 오로지 신적 질서에 속하는 것이므로, 인간사를 비롯한 모든 사물의 궁극적 기준과 목표 및 지향점은 신이라고 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의 명제는 프로타고라스에 의해 제기된 것으로,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고 하는 것이다. 인간이 모든 것의 주인이고, 또한 판단과 평가의 주체도 인간 자신이므로, 결국 인간 만사의 최종적 기준은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다.

첫 번째 명제는 도덕적 절대주의를 함의하는데, 그에 비해 두 번째 명제는 도덕적 상대주의를 함의한다. 그러나 실제적인 인간의 삶의 차원에 있어서 이 두 가지 명제는 어떻게 연관되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이 논의에 앞서 짚고 넘어갈 것이 있는데, 절대주의에서 ‘절대’라고 하는 용어에 대중적 오해가 있다. 절대라고 할 때, 보통 많은 사람들은 상대적인 것의 연장으로서의 절대, 즉 수많은 상대적인 것 가운데 하나를 절대화하여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인식하는 것을 상정한다. 그러나 파르메니데스적 명제에 있어서 만물의 척도가 되는 신적 질서로서의 절대적 영역은 상대적인 것을 절대화 한 것으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절대로서의 절대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고 하면, 도덕적 가치기준은 시대와 상황의 요구나 일시적 감흥에 따라, 또는 사람에 따라 바뀔 수 있음을 용인하는 것이다. 만물의 척도로서의 궁극적 기준이 가변적이라고 하면, 그것은 이미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또한 실제 역사를 더듬어 보더라도 정치사회적 생활의 명에서 이러한 성격의 기준은 진정한 질서의 표상으로서 기능하기보다는, 정치적 억압과 독재의 도구로서 기능하였을 뿐이다.

그러한 점에 비추어볼 때, 만물의 궁극적 기준이 인간이 아니라 신이라고 하는 파르메니데스의 명제는 일단 누구나 원칙적으로 동의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명제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모든 차원과 국면에서의 삶을 영위해 가는 데에 있어서, 사고와 행위의 결정, 판단, 평가를 위한 기준과 척도를 실제로 필요로 하는 것은 바로 인간 자신이다. 바로 여기서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만물의 척도가 신이라고 하는 파르메니데스적 명제를 수용한다면, 어떻게 이들 양자 간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가? 이 차이를 극복하는 논의가 바로 플라톤의 신성에 대한 원칙에 담겨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근본적 대전제로서 만물의 궁극적 근원이 신이라고 하는 점에서는 파르메니데스적 명제가 유효하고 타당하지만, 실제 삶의 국면에서 판단 기준을 필요로 하는 것은 인간인 만큼, 프로타고라스적 명제의 필요성도 제한적인 범위에서나마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이 존재의 궁극적, 초월적 근원에 참여함을 통하여 자신의 의식의 질서화를 이룩한다면, 즉 신적인 절대적 기준에 자기 자신을 복종시키고 그 신적 영역에 자신의 의식을 침투시킨다면,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인간의 의식 내에서 파르메니데스적 명제와 프로타고라스적 명제의 절묘한 교집합을 이뤄낼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플라톤은 인간의 교육과 관련하여 지금까지 설명한 음악과 문학만큼이나 체육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 목적은 육체 근육의 강인함을 계발하는 것뿐만 아니라, 기백과 철학 등 영혼의 요소들이 인간의 삶의 다른 요소들과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데에 있다. 소크라테스는, “일생 동안 체육에만 열중하고 음악과 문학은 접해보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생각해본 적 있는가? 또는 그 정반대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의 경우는?”이라는 질문을 남겼다. 이에 대해 플라톤은 『국가』 제3권에서 아래와 같이 답하였다.

“순전히 체력단련에만 전념해온 사람들은 필요 이상으로 사나워지는 반면, 음악에만 매달려온 사람들은 필요 이상으로 성정이 부드러워진다. 사나움은 본성의 격정적인 면에서 유래하는데, 이 격정적인 면은 옳게만 양육되면, 용감해지게 되지만, 필요 이상으로 조장하게 되면, 성격이 경직적이고 거칠게 된다. 온순함을 가져다는 것은 지혜를 사랑하는 성향이다. 그리고 너무 온순해지면, 필요 이상으로 성격이 부드러워지지만, 훌륭하게 양육될 경우에는 성품이 단정하게 된다. 위정자들은 용감하고 단정해야만 한다.”

플라톤의 교육관에서 음악(문학을 포함하여)과 체육을 강조하는 초등교육은 18세까지 계속된다. 그 이후에는 2년간 의무적인 군복무가 있다. 군복무 과정에서 인품과 덕성을 심사하여 수학을 강조하는 중등교육을 받을 자격이 있는 소수의 인원을 선발한다. 10년 과정의 중등교육 과정을 이수한 이후에, 이성적인 사유를 할 수 있는지 그 능력에 따라 철학과 도덕원리에 관한 탐구를 강조하는 고등교육을 받을 인원을 최종적으로 선발하게 된다. 고등교육 과정은 약 5년간의 기간을 필요로 한다.

고등교육 과정까지 완수하고 30대 중반에 된 사람들이 작은 영역에서부터 공무를 맡아 정치를 하게 될 것이다. 정치인이 50대가 되면 그들 중에서도 탁월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시간을 진리를 탐구하는 것과 최고통치회의의 구성원으로 일하는 것으로 보내게 될 것이다. 정치인이 진리를 탐구하는 목적은 겉으로 보이는 사물들 너머에 놓여있는 실재를 이해하여 궁극적인 선을 깨닫고 그것을 국가의 비전으로 인식하기 위해서이다.

플라톤은 철학적 영혼에 관한 이해를 계발하는 일에 있어서 두 가지 유형으로 사람들이 구별될 수 있음을 논하였다. 바로 진리를 사랑하는 자(philosopher)와 의견을 사랑하는 자(philodoxer)이다. 전자는 지식을 갖고 있는 자들이고, 후자는 주관을 갖고 있는 자들이다. 지식과 주관 차이는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확실하고 정확한가의 차이라기보다는, 실재 자체에 어느 것이 얼마만큼 더 근거하고 있는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은 실재에 더 가까운 것이 더 신뢰할만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기에 주관이 아니라 철학적 지식을 소유한 자가 통치의 최고결정권자를 맡아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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