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해유록] 2부 – 시모노세키 포대와 부국강병
#시모노세키 포대를 보며 부국강병에 대해 생각하다
후쿠오카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도착한 곳은 시모노세키시의 가라토시장이었다. 그 전날부터 비박과 밤샘 등으로 컨디션은 별로였지만, 가라토 시장의 명물인 복어 요리를 먹으며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건물 밖으로 나가자, 시모노세키시와 기타규슈시 사이의 간몬해협을 볼 수 있었다. 간몬해협이 대양도 아니고, 한국의 남해안의 풍경과 비교해서 특별히 다를 것은 없었지만, 그날따라 정적이면서도 차분한 간몬해협의 모습은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그 인상은 가라토 시장과 불과 몇분 거리인 시모노세키 포대에 이르러 더욱 깊어졌다. 사실 시모노세키 포대 옆에 있는 단노우라 격전지가 조금 더 유명할 것이다. 그렇지만 일본의 근대에 관심이 많은 나로선 헤이안 시대의 유적지보단 시모노세키 포대가 훨씬 눈에 들어왔다. 사실 포대 자체에는 특별한 점은 없었다. 그러나 그 포대가 가진 역사적 맥락은 분명히 배워야 할만한 가치가 있었다.
19세기의 동아시아 바다는 서양 열강들의 함선들이 출몰하며 각국과 크고 작은 충돌을 빚던 곳이었다. 그 충돌은 청 제국에서는 두 차례의 아편전쟁으로, 조선에서는 병인양요·신미양요, 일본에서는 시모노세키·사쓰에이 전쟁의 형태로 나타났다. 흥미로운 지점은 충돌 이후에 각국의 사회 지도층이 보여줬던 양태였다. 청 제국에선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며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빠르게 상실됐고, 조선에서는 서양 세력에 대한 여론이 더욱 악화됐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국내 정치에서 여론이 들끓거나 소요 사태가 발생했을뿐, 서양 열강에 맞설 군사력을 구축하는 등의 개혁 조치는 지지부진하거나 시기를 놓쳤다.
그런데 일본의 정치세력은 서양 열강과의 충돌 이후 그들의 세계관과 전략을 빠르게 수정했다. 그리고 그 변화의 조짐은 이미 민중이나 하급무사 세력의 지지를 이미 잃은 에도 막부가 아닌 다른 곳에서 일어났다. 당시 일본의 유력 번 중에서도 그 세(勢)가 대단했던 조슈번(現 야먀구치 현)은 사쓰마번(現 가고시마·미야자키 현)와 더불어 그 변화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두 번은 서양 열강과의 충돌 전까지만 해도 존왕양이(尊王攘夷)를 외쳤으나, 앞서 언급한 두 차례의 전쟁(시모노세키, 사쓰에이)으로 서양 열강의 무력을 실감, 가장 빨리 전향했다. 그들이 추구하던 막부타도를 위한 ‘존왕(尊王)’의 기치는 유지하되, ‘양이(攘夷)’의 노선은 빠르게 폐기한 것이다.
정말 중요한 지점은 그들의 전향이 단순한 노선 폐기에 그친 게 아니었다는 점이다. 조슈번에서는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가오루 같은 인사들이 영국 유학길에 올랐고, 사쓰마번에서도 사쓰에이 전쟁에서 패배한지 1~2년도 채 안되어 역시 영국에 유학생을 파견했다. 일본정치사상사 분야의 권위자인 마루야먀 마사오 교수의 대담집인 《번역과 일본의 근대》에서는 그런 일본 사회의 특징을 이렇게 표현했다. “졌다고 생각하면 바로 상대국 유학인거죠” (마루야먀 마사오 교수·가토 슈이치, 『번역과 일본의 근대』, 이산, 2000, 21쪽)
졌다고 생각하면 유학을 간다. 다르게 표현하면 상대방의 강함을 빠르게 인정하고, 그 강함을 내 것으로 체화하려고 온갖 방법을 강구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멘탈리티(Mentality)는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도대체 무엇이 일본의 정치가들에게 그런 사고방식을 체화하게끔 유도했단 말인가? 일단 보유한 전략과 무기를 끊임없이 쇄신하지 않으면 각 개체와 조직의 존재가 언제든 공격받아 무너지기 마련인 ‘군인’ 신분이 그 조건 중 하나일 듯 싶다. 그리고 헤이안 시대 이래 천년 넘게 일본 정계를 주무른 무사 역시 그런 군인의 습성을 본능적으로 추구하는 계층이었다.
일본사에서 유례가 없던 내전 시기인 센고쿠지다이(전국시대)는 그런 무사들이 생존과 번영을 위해 온갖 쇄신을 마다하지 않던 시기이기도 했다. 당시 유력 다이묘들은 다른 다이묘의 침입으로부터 자신의 영지와 재산을 지키기위해 어떠한 신무기 도입도, 외부 세력과의 연대도 마다하지 않았다.
포르투갈인이 가져온 철포를 전격 도입해서 다케다 신겐의 기마대를 궤멸한 오다 노부나가, 아예 기독교 신자로 개종하면서까지 서양 선교사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려 했던 고니시 유기나카 등, 한국인들도 알만한 그 당시 일본의 지도자들은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것이든 받아들이려는 자세를 이미 체화하고 있었다. 그런 맥락에서 앞서 언급한 근대 일본의 멘탈리티는 최소한 전국시대부터 그 명맥이 이어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못해도 수백 년 동안 축적된 멘탈리티는 결국 근대 일본을 당대 동아시아 세계에서 유일한 열강을 넘어 제국으로 만드는 토대가 됐다. 그리고 나는 그러한 근대 일본의 멘탈리티, 특히 부국강병에 대한 집념이 담긴 멘탈리티만큼은 오늘날 한국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다고 생각한다. 가치외교를 하든, 복지국가를 건설하든, ESG를 중요시하든, 결국엔 부국강병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일장춘몽에 불과한 가치와 꿈들이 아닌가. 그런 맥락에서 오늘날 한국의 실상을 되짚어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해봐야 한다.
지금의 우리는 부국강병이라는 국가의 근본을 너무 당연하게 여기고 있지 않은가? 아니면 너무 소홀히 여기고 있진 않은가? 또한 부강함을 갖추기 위한 지적 전통과 감각을 축적하는 것에 과연 얼마나 관심을 보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