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의 사이 – 각자가 함께 라는 믿음
해도해도 이런 여름은 처음이다. 역대급으로 세다는 표현이 올 여름 폭염만큼은 전혀 지나치지 않다. 오늘이 가장 덥다는 말을 매일 새롭게 하고 있으니. 그래서인지 사람들도 화(火)를 잔뜩 담고서 누구도 가까이 다가오면 가만두지 않을 테야, 라는 태도로 이글거리는 것만 같다. 모든 건 ‘태양’ 때문이었다는 ‘알베르 까뮈’의 소설 <이방인> 속 ‘뫼르소’의 대사가 떠오른다. 그 정도로 올 여름의 태양은 인간의 실존마저 녹여버릴 기세다. 거리두기로 버틴 코로나 시절이 지나자마자, 이 폭염에서 살아남기 위해 거리두기가 필요한 상황이 되었다. 타인의 살갗이 닿는 일이 이토록 무서운 일임을 매일의 출근 길에 실감 중이다.
사이(gap, space)와 사이(relationship)라는 단어가 같은 모양인 건 그저 우연만은 아닌 것 같다. 아름다운 관계를 위해 지켜야 할 아름다운 거리를 강조하는 이유는 사이(relationship)에는 사이(gap, space)가 필요하니까.
견디기 힘든 생(生)의 고통이나 깊은 공포는 결국 슬픔이라는 감각으로 수렴되고는 한다. 올 여름 우린 그런 비극을 자주 맞아야 했다. 아픈 것, 두려운 것, 쓸쓸한 것, 이런 감정은 이윽고 슬픔이 된다. 삶이란 슬픔을 견디는 과정임을 새록새록 새기게 한다. 그 슬픔에 잠식당하지 않기 위해 사람들은 저마다 알뜰살뜰 무언가로 일상을 채우고자 애쓴다. 관계의 온도, 추억의 아련함, 존재의 이유 등 가시적이지 않은 것들을 물성이 있는 것으로 바꾸려 시도한다.
어딘가, 혹은 누군가에게 갇히고 싶지도 않지만 실존이 망각이라는 심연 속으로 산산이 흩어져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태생적 슬픔이야 말로 인간이 36.5도라는 체온을 지니게 된 까닭인지 모른다. 체온은 조금만 낮아져도 또 조금만 높아져도 생명 유지에 지장을 초래하고, 피부 아래 얽힌 붉고 긴 혈관의 복잡함은 항상성을 위한 중요한 장치가 된다. 혈관이 꼬이면 목숨이 위태로워지듯 사이(relationship)에도 사이(gap, space)는 그만큼 중요하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홀로 살아갈 수 없고, 또한 어떤 존재와 내내 딱 붙어 살아가는 일도 힘들다. 붉은 혈관처럼 관계와 관계 사이에 이어진 붉은 실을 쥔 손에 너무 힘을 주면 실은 팽팽해지다 끊어질 수 있다. 지나치게 느슨하면 실이 지닌 이어짐이라는 의미를 희석시킨다. 그러니 사는 동안 혈관을 돌보듯, 그 실을 가만가만 쥐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각자가 함께 라는 믿음으로 붙잡고 있는 그 실을 잘 돌보는 한 고통이나 슬픔도 견딜만한 무엇이 되리라고.
울어도 좋아, 내 앞에서는. 바로 그런, 믿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