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 길을 걷네. 11] 만해마을 거쳐서 백담사 가는 길, 혁명가 K를 찾아서!
올여름 강원도 인제군에서 열리는 만해축전의 행사 중 ‘님의 침묵 백일장’에서 심사를 맡게 되었다. 오래전부터 설악산 백담사에 한번 가 보고 싶었다. 체력이 된다면 오세암까지 가보고 싶었는데, 여태 가지 못했다. 제주도보다 가까운 곳인데 왜 여태 저길 가지 않았을까 싶었지만, 간절해졌다가 잊어버렸다가를 반복한 것이다. 만해 한용운 선생이 수도한 깊은 산사라서 그 청정함에 젖어보고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사람들을 많이 죽인 독재자를 받아준 백담사가 나의 호기심과 순정한 마음을 꺾어놓은 것도 사실이었다. 이제 드디어 백담사에 갈 때가 되었나 보다.
기차표를 예매하려고 코레일 홈페이지에 가보았더니, 인제에는 기차역이 없었다. 고속버스터미널에 가보았더니 동서울터미널에서 버스가 있었고 용대리 백담사 입구 정류장에 내리면 만해마을도 가깝고, 백담사도 갈 수 있었다. 아싸 여행이다. 초행길은 언제나 설레고 긴장이 된다. 동서울 터미널에서 9시30분 버스를 탔는데 용대리에 내리니 11시40분이었다. 만해교를 건너오니 두 갈래길과 표지판이 나온다. 오른쪽으로 2km를 걸으면 만해마을이고 왼쪽 앞으로 7km를 가면 백담사라는 것이다.
아침을 걸러서 배가 살짝 고팠고, 점심시간을 앞두고 있었기에 점심을 먹고 들어갈까 하다가, 주최측 김시인에게 전화를 했더니 식사가 준비되어 있으니, 그냥 오라고 한다. 그렇다면 얼른 가야지. 하지만 8월 중순의 한낮 더위가 만만치 않았다. 버스도 없다. 작은 배낭을 메고, 햇살을 가리는 양산을 들고 타박타박 걸어가는데, 다행히 바람이 살살 불어서 걸을 만했다. 개천을 따라 난 한적한 길가에 크지 않은 나무가 심어져 있었는데, 푸른 열매 주황빛 열매가 올망졸망 달려있어서 신기했다. 렌즈로 찍어보니, 마가목 열매였다. 강원도답구나!
서울 인근에서는 볼 수 없는 저 독특한 가로수가 내 기분을 상쾌하게 흔들어주었다. 처음 걷는 만해로를 걸으면서 옆에 시내가 보이면 시냇물을 구경하고, 펜션이 보이면 펜션을 구경하고 걸어걸어 시집 박물관에 도착했다. 몇 년 전 내가 작은 중고차를 운전할 때, 이곳 시집 박물관을 들렀던 기억이 났다. 시인으로 살고 싶었지만 아직 시집 한 권을 내지 못한 채, 몸이 아파 떠돌 때였다. 푸른 숲속에 세워진 멋진 시집박물관이여 제게도 한 권 분량의 시집이 있나이다만, 내 시는 언제 거기에 들 수가 있을까요? 혼자 읊조리며 둘러보았었다.
조금 더 걸으니 저 앞에 동국대학교 만해마을 캠퍼스가 눈에 들어왔다. 강원도 설악산 자락의 청정지역에 만해 한용운을 기리는 박물관이자 창작공간이 아름답게 조성되어 있었다. 입구의 식당으로 들어가는데 심사위원을 맡은 몇 분의 선생님들이 지나가신다. 아는 얼굴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문밖에 나와 나를 맞아준 김 시인과 반갑게 인사하고 보니, 시원하게 잘생긴 얼굴이었다. 다들 식사를 마친 후라서 나 홀로 점심을 먹었다. 음식이 참 맛있네요. 잘 먹겠습니다. 인사를 했더니 많이 드시라고 웃어주신다. 나는 시래기나물과 여름채소 겉절이, 시래기를 잔뜩 넣은 된장국과, 오리고기, 산나물을 듬뿍듬뿍 가져다 먹었다. 강원도 산골의 인심처럼 푸근하고 깊은 맛이었다.
식사를 마친 나는 만해마을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평화의 종과 분수 사이에 커다란 목어가 걸려 있고, 잘 가꾸어진 잔디에 님의 침묵을 위한 묵상의 광장을 마련해 두었다. 마주보는 건물 사이로 산골 물을 끌여들여 건물 앞으로 맑은 물이 지나간다. 건물 끝에는 300여 편의 시를 동판에 새긴 ‘평화의 詩壁’을 조성해 두었다. 카페에 들어서니 시인 K가 문앞으로 나왔다. “아, 선생님! 이렇게 만나게 되네요.” 우리는 단박에 손을 잡고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페이스북으로 인사를 나누고 친구로 소식을 주고 받은지 7년만이었다. 이제야 만날 때가 되었나 보다.
주최측의 김시인과 K와 나는 창가에 따로 자리를 잡았다. 흰 쟈켓에 얇은 모자를 쓴 나와 보라색 쟈켓에 모자를 쓴 김시인을 향해, “다들 부르주아의 옷차림이시군. 나는 프롤레타리아인데… ” 하고 K가 말했다. 나는 “행사 참가자들도 생각하고, 선생님 만나려고 하얀색으로 입고 왔죠.” 하고 웃었다.
2시가 되자 강당에서 만해축전 ‘님의 침묵 백일장’이 시작되었다. 인제군수님과, 인제신문사 대표님, 군의원님들이 정성스럽게 축사를 하시고, 백일장 글제가 발표되었다. 올해는 참가자가 적었다. 실무자가 바뀌었는지 홍보도 부족했으며 주말이 아닌 월요일에 행사가 열린 탓이었다. 숲에서 실내에서 까페에서 사람들이 글을 쓰는 동안 K와 나는 행사를 시작하는 절차에 대해 첫인상을 나누었다. 글 쓰는 행사에서 왜 굳이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느냐고 K가 물었다. 자기는 하지 않았다고…. 나는 “선생님이 옳아요.” 인정을 했다.
요즘은 좀 어떠세요? 과로에 힘들지 않으세요? 근황을 물었더니 조합원들이 단결해서 불공정 초과근무를 개선했다고 했다. 오, 선생님 대단하시네요. 몇 년 전 우편배달 노동자들이 몇 사람이나 죽어갔잖아요. 그때 제가 선생님 다치거나 죽을까봐 얼마나 걱정됐는지 몰라요. 이렇게 건재하시니 정말 다행입니다. 요즘도 매일 시를 쓰시나요? 네 한 500편 써 두었어요. 오토바이 몰고 달리다보면 좋은 풍경도 만나고, 시상도 떠올라서 길가에 오토바이 세우고 쓱쓱 시를 쓰곤 하죠. 좋은 출판사 만나서 시집을 내셔야죠.
참가자들이 글쓰기를 마치자, 심사도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예심에 속한 나는 본심에서 내가 한 평가가 살짝 뒤집히는 걸 보았다. 나는 조금 질박해도 자기만의 생각과 깨달음, 진정성이 있는 글을 좋아하는데, 본심에서는 이미 예술가로 우뚝 선 다른 나라의 예술가 (빈센트 반 고흐)의 삶을 가져와서 언어로 잘 요리한 글이 장원으로 뽑혔다. 글과 삶의 거리가 가까운 것이 진짜 독창적인 글인데, 왜 다른 장치를 가져와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심사를 마치자 노을의 시간이었다. ‘평화의 詩壁’에 새겨진 동판을 감상하며 나의 시를 생각해 보았다. 나는 대중적이지 않은 독특한 영역에서 나만이 쓸 수 있고, 꼭 써야할 시를 썼다. 난해하다, 골치 아프다고 하면, 제가 좀 건강에 해로운 시를 썼어요. 다 읽지 않아도 되니 맘에 드는 것만 읽으세요. 이렇게 말하곤 한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님의 침묵’을 낭송한 김은숙 선생을 만났고, 인제신문사 대표님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에 대한 절실한 마음을 지닌 두분께 시집을 부쳐드려야겠다.
만해 한용운 선생을 생각해 보았다. 1879년 홍성에서 태어나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한 후, 1894년 백담사에 들어와 불교에 심취했다. 1913년에 통도사불교강사에 취임하여 <<조선불교유신론>>을 강의하고 책으로 간행했다. 조선불교청년동맹을 결성하고 <<유심>>지를 창간했다. 3.1운동에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으로 참가했고, 독립운동에 힘썼다. 1926년 <<님의 침묵>>을 출판하고, 1927년에 신간회 중앙위원을 지냈으며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을 썼다. 1944년 광복을 1년 앞두고 성북동 심우장에서 돌아가셨다. 생전에 시집으로는 <<님의 침묵>> 한 권을 내셨지만 불교공부와 독립운동에 매진하였고 시집을 많이 내지 않으셨다. 많은 시집을 내는가와 정말 좋은 시를 쓰는가는 다른 문제이다. 뜻이 깊고 호방한 삶을 살았던 분인데, 님의 침묵 속 시적 화자는 여성의 목소리를 취하여 간절함을 구했다. 언제 읽어도 아득한 절창이다.
저녁식사를 마치자 장난끼가 가득한 K 시인이 지금이 바로 쏘가리를 잡을 시간이라고, 냇가에 들어가 쏘가리를 잡자고 했으나, 일이 커진다고 우리가 말렸다. 관계자들이 다 돌아간 후 우리는 좀더 얘기를 하자고 하면서 먼저 숙소 두 칸을 잡아놓고 술집을 찾아갔다. 김 시인과 K는 기분좋게 술을 마실 줄을 알았고, 나는 술을 못마시지만 사람이 좋으면 사람구경에 사람에 취한다. 행사 사회를 잘 보는 김 시인의 시원시원한 성격과 언어순발력이 기분좋은 활기를 주었다. 인제 출신이며 인제에서 살아가는 분인데 백담계곡의 물처럼 창의적이고 유연하다. K 시인과는 서로 주거니 받거니 쿵짝이 맞았다가 어긋났다가 한다.
마침 옆자리에 젊은 군인 두 명이 기분좋게 술을 마시고 있는데, 김시인과 K시인이 그들에게 말을 걸고 인사를 땡겼다. 두 젊은이는 중학교 동창인데 군대에서 소위와 하사로 다시 만났다고 하면서 휴일전야를 즐기고 있었다. 뜻밖의 장소에서 조카들을 만난 듯 K시인은 군인들에게 지폐 한 장을 꺼내 응원을 한 후, “사회주의자는 돈을 모으지 않는다. 오늘 술값은 내가 다 계산하겠다”고 선언하고 있었다.
술자리가 두어 시간이 넘어가면 더 이상 쓸데있는 말은 나오지 않고 습관적인 말이 무한 반복된다. 나는 내일 백담사에 가고 싶은데, 만해마을 숙소에 혼자 남았으면 좋았을 걸 ….. 후회를 했지만 밤은 깊고 1시가 넘었다. 김시인과 나는 사회주의자 K 시인을 놀려먹었다. 빨리 숙소에 가서 편하게 쉬고 싶었지만 어디가 어딘지 차로 옮겨가지 않으면 나는 갈 수가 없다. 김 시인의 남편이 우리를 위해 운전을 해 주려고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술자리는 쉽게 끝나지를 않았다. 그는 실내로 들어와서 인사를 했는데 아주 곱게 나이든 어른이었다. 나이는 많으나, 마음은 청춘이어서 아내와 지인들의 술자리를 정리하고 숙소에 우리를 태워다 주려고 문밖에 와서 기다리고 계셨다. 그분의 몸에서 흐르는 순한 에너지는 아내에 대한 헌신과 순애보를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보여주고 있었다. 정말 놀라웠다. 두 분의 만남에 대해 따로 이야기를 더 들어야겠다.
술집에서 나온 건 새벽3시, 숙소에 들어와서 거의 뻗고 말았다. 내일 백담사를 가고 싶은데, 눈이 아프고 몸은 물에 빠진 솜처럼 너덜너덜해졌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이미 8시가 넘었다. 10시에 나가자고 전화를 걸었다. K는 용케도 멀쩡한 얼굴로 마당에 나왔다. 그의 차로 백담사 입구에 가서 황태국으로 아침을 먹었다. 그렇게 많이 마시고도 괜찮냐고 물었더니, 전화받고 나서 계속 따뜻한 물속에 들어가 해독을 하고 있었다고 팁을 말해 주었다. 애주가들은 다 방법이 있구나.. 욕조가 없는 숙소에서는 어떻게 한담?
역시 강원도는 황태다. 명태는 러시아에서 오더라도 인제에서 끓인 황태국은 맛이 좋았다. 식당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백담사로 올라가는 셔틀버스를 탔다. 백담사 계곡물이 나무 사이로 내려다 보이는데 초록이었다가 옥색이었다가 바위마저도 희고 투명해서 어마어마한 보석 덩어리 같았다. 20여분 지나 백담사에 도착했다. 올라오는 길은 좁은 낭떠러지 길인데 비해, 절집 자리는 널찍하고 계곡도 평평하게 자갈을 드러내어 많은 사람들이 발을 담그고 놀기 좋았다. 경내를 한바퀴 돌고 만해기념관을 둘러보면서 만해의 붓글씨에 감탄을 했다. 시도 글씨도 삶도 깊고 아름답구나. 대웅전은 극락보전인데 위압적이지 않은 자그만 목조금박부처를 모셨다. 절 앞의 냇가에 나가 물 속에 발을 담그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주로 K 시인이 말하고 나는 들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우편배달을 다니면서도 끝없이 시상이 떠올라서 하루에도 몇 번이나 오토바이를 멈추고 시를 써서 SNS에 올린다고 한다. 우체국의 과한노동을 노동조합의 단결로 막아내고 요즘엔 위험하지 않다고 했다. 부조리한 일을 막아내는 일도 강고한 권력의 카르텔에 막히기 쉬운데 다행히 성공했다고. 술을 그렇게 많이 마시고도 건강이 괜찮은지 물어보았더니, 자기는 어렸을 때 시골생활도, 도시에서의 고학도 해봤고, 20대에 현대자동차에서 노조활동 하다가 많이 맞아서 한동안 정신과 약을 먹었고, 죽을 뻔한 적도 지나왔다고 했다. 요즘엔 사람이 보지 않을 때는 산도 뛰어넘는다고 우스개를 했다. 힘들면 언제든 말하란다 업고 간다고… 이런 농담도 할 줄 알고 나보다 나이도 어리다니, K시인이 갑자기 귀엽게 느껴진다.
옥같은 백담계곡을 혼자 걸어서 내려오고 싶다는 생각도 해봤으나, K시인이 살아온 전쟁같은 날들, 노동현장에서 동료가 죽고 다치고 장례 치르고 수습해온 날들, 그 많은 고난을 지나 지금이라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게 존경스러워서 그랑 좀더 있고 있고 싶어졌다. 버스터미널에 데려다 달라고 하니 홍천으로 향한다. 점심을 먹고 헤어져야할 것 같아서 4:20분 버스표를 샀다. 2시간 가량이 남아있었다. 그러니까 K는 수타사로 차를 몰았다. 수타사 뒤의 공작산이 예쁘고, 연못에 연꽃 보러 가자고 했다. 수타사 입구에서 산채비빔밥과 버섯곤드레비빔밥을 먹었다. 수타사 앞 수양버들과 연꽃을 보며 연못을 한바퀴 돌고 내려왔다. 참 예쁜 절이었다.
버스시간이 간당간당해져 조바심을 내니까, 그가 말한다. 버스 놓치면 서울까지 데려다 준다고. 업고 가겠다, 서울까지 데려다주겠다는 장난을 치는 것도 따스하고 귀여웠다. 서울에게서는 들을 수 없는 농담이다. 같은 모텔에서 동침한 사이라는 비밀을 가지고, 우리는 1박2일 인제 골짜기를 누비고 왔다. 척, 강원도에 접어들면 생각날 친구 한 명, 날렵한 모터사이클 혁명가 K를 만났다.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