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구점 여인」을 읽고 – 이뤄지지 않은 민주주의의 꿈

이미지=토끼풀

 
작중 주인공은 초지일관 혼란스럽다. 어디부터 꿈이고, 어디까지 상상이며, 어느 부분까지 주인공의 진심인지 독자도 알기 어렵다. 화자의 심상뿐만 아니라 문장 자체도 혼란스럽게 쓰인 것 같다. 겉으로 보기에, 이 소설은 가정부 출신의 계모와 반신이 불구인 완구점 여인에게 증오와 질투, 섹슈얼한 감정을 느끼는 한 소녀의 혼란한 심상을 옮겨 놓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는 글이 쓰인 시대가 신경쓰였다. 「완구점 여인」은 1968년에 발표되었다.1) 1968년은 박정희가 불법 쿠데타를 일으켜 국회의원 2/3 이상이 동의해야 한다는 헌법 개정 조항을 묵살하고 국민투표로 제3공화국의 막을 연지 6년이 지난 해다. 만약 이 단편이 쓰인 해가 2023년이었다면 복잡한 섹슈얼 소설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심상과 표현 방식을 보니 시대적 맥락이 분명해 보였다.

작중 죽은 남동생은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을, 완구점 여인은 자유로운 민주주의 이상향을, 계모는 청산되지 않은 친일 권력 집단을, 주인공은 그 혼란스러운 격동기를 살아가는 혼란스러운 소시민을 상징한다.

주인공은 반신불수로 휠체어를 타는 남동생, 가정부와 함께 일본식 2층 집 셋방에서 살았다. 집 안에는 어두운 다다미 방, 곰팡내 나는 붙박이장, 음도 제대로 나지 않은 상아 피아노뿐이다. 어머니는 언급조차 없으며, 아버지는 집에 오지 않는다.

광복 후 일본 자본가들이 남긴 적산(敵産)은 본래 이해당사자의 것이 되었어야 했으나, 대부분은 정경유착으로 이어진 기업들에게 넘어갔다(그마저도 6.25 전쟁 때 상당수 파괴되었다). 그 중에는 친일 기업도 있었다. 뭐 하나 제대로 갖춰진 것이 없는 일본식 집 2층 셋방에서, 권력자는 집에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일본) 대신 가정부(친일 권력 집단)다.

밖에 자유롭게 나가지 못하는 남동생은 집안에서 그림만 그린다. 남동생에게는 창문 밖 세상이 전부이고, 유일한 취미인 그림 그리기의 소재는 주로 벗은 주인공과 자신이다. 남동생은 가정부의 벗은 몸도 그리려 했다. 가정부는 웃음을 지으며 동생의 머리를 툭툭 건드린다. 얼마 후 동생은 주인공에게 새로운 그림을 보여주려다 계단에서 떨어져 죽어버린다.
 

 
휠체어에 앉은 제2공화국은 시민 혁명으로 탄생한 민주공화국이었으나 미흡한 제도적 장치와 불안정한 정치 환경을 갖고 있다. 제 자신도 제대로 못 가누던 제2공화국은 반신불수와 좁은 시야라는 시대적 한계를 버티지 못하고 사라져버린다.

한 가지 부자연스러운 점은 가정부가 남동생의 머리를 툭툭 건드린 다음에 머리가 부서져 죽었다는 것이다. 수박을 살 때 어떤 수박이 더 잘 쪼개질까 아닐까를 고민하며 툭툭 두들겨보듯, 민주공화국이 쿠데타로 무너질지 아닐지 확인하기 위해 군부는 흉물스럽게 웃으며 제2공화국의 머리를 두들겨본 것이다.

죽기 직전 남동생이 주인공에게 보여주려 했던 그림은 맨드라미 꽃과 벌거벗은 가정부의 모습이다. 맨드라미 꽃의 꽃말이 ‘치정’과 ‘괴기’라는 점에서 다잉 메시지처럼 그의 죽음이 석연치 않다는 인상을 준다. 또한 계단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도 휠체어 바퀴를 움켜쥔 채 계단 밑으로 굴러떨어졌다는 것은 친일 권력 집단의 투명한 실체를 보여주려고 한 탓에 암살당한 것 같은 인상을 준다.

동생이 죽은 뒤에 아버지가 돌아온다. 아버지는 가정부와 정사(情事)를 가지며 가정부를 임신시킨다. 계모가 된 가정부는 주인공이 눈물을 흘리며 만류하는데도 불구하고 동생의 그림을 모두 지워버린다. 정작 친구들에게 따돌림당하거나 학교에서 물건을 훔치는 주인공의 생활에 대해선 무신경하다.

이는 제2공화국이 무기력하게 죽어버리자 영영 마주할 일 없을 것 같았던 일본과의 외교 관계가 재건되고 한일기본조약을 통해 친일 권력으로 뒤덮여있는 제3공화국의 잉태를 그린 것 아닐까. 여기서 주인공이 할 수 있는 일은 교실의 분필을 챙겨 변소 벽에 ‘엄마 나쁜 년’이라고 낙서할 뿐이다. 마치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이 변소 벽에 ‘이완용 식당’, ‘이완용 보지 자지’2)라고 적어 나라를 잃은 울분을 삼킨 것처럼.

한 가지 재밌는 점은 주인공은 계모를 증오하지만 한 편으로는 그녀에게 일종의 성적 도착과 연민이 섞인 복잡한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는 만삭의 계모가 선글라스를 쓰고 클럽에 가 자신의 춤출 짝을 찾는 대목에서 두드러진다. 춤을 추는 상대 남성은 계모가 임신을 했다는 것을 눈치채고 당황하며 빨리 춤이 끝나길 바라고, 주인공은 몰래 그 모습을 보며 역시 연민과 분노와 서러움이 섞인 복잡한 감정을 느낀다.

주인공은 합법적이지 않은 쿠데타로 건설된 권위주의 공화국에 증오를 느끼지만, 대통령이 선글라스를 쓰고 해외로 나가면 못 사는 나라의 지도자라고 무시당하고 정통성 없는 독재자라고 창피를 당하는 모습에 서러움을 느낀 것이다.
 

 
이후 주인공은 자신의 남동생처럼 휠체어를 타는 완구점 여인에게 알 수 없는 성적 매력과 질투를 느낀다. 그녀와 함께 서로의 진심을 나누며 신체적 관계를 맺는 꿈을 꾸기도 하고, 그녀를 위한 편지를 쓰기도 한다. 여인의 모습에서 죽은 남동생을 연상하며 그녀가 파는 붉은 오뚝이를 매일 한 개씩 사 오기도 한다. 그러니 주인공의 연정은 혼자서 끌어안고 있는 환상일 뿐 그 마음이 여인에게 닿는 일은 없다.

소시민을 상징하는 주인공은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을 잃고서 고통스러운 마음을 절대 닿을 수 없는 민주주의 이상향을 보며 자위(自慰)할 뿐이다.

그러나 완구점은 어느 날 갑작스럽게 사라진다. 그 자리에 시끄러운 스피커가 울리고 형형색색의 전등이 실내를 밝히는 다방이 들어선다. 주인공은 그 여인이 있던 자리와 휠체어의 바퀴 소리를 추억하며 그간 모아왔던 오뚝이들을 모두 없애버리기로 마음먹는다.

소시민은 이제 희망을 보며 자위조차 할 수 없다. 할 수 있는 일은 달팽이처럼 딱딱한 껍질 속에서 소시민으로서 주어진 역할에 충실히 움츠리며 사는 것 뿐이다. 완구점 여인은 편지를 받지 못했고, 소시민은 민주주의를 보지 못했다. 마치 예언이라도 한 것처럼 소설이 나온 지 4년이 되는 해, 대한민국엔 겨울공화국이 시작된다.

방황하는 주인공은 밤이 되어서야 짜릿한 자유를 만끽한다. 친구들의 물건을 훔치고, 학교 복도에서 치마를 걷고서 방뇨하고, 복도 바닥에 누워 구르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 종종 복도를 지나는 경비들 탓에 두려움을 느끼지만 들키는 일은 없다.

권력이 두 눈 부릅뜨고 국민을 감시하는 낮에는 체제에 갇혀 살지만, 통금 시간이 지난 밤이 되어서야 자유를 만끽한다. ‘태양이 자신의 빛을 거둔다.’ 소설의 첫 문장은 태양을 담은 욱일기가 깃대에서 내려 온 후에야 우리가 자유로워진다는 메시지가 아닐까.
 


 
1) 오정희, 『불의 강 (오정희 소설집)』, 문학과지성사(개정판, 2022). 모든 단편 마지막 페이지에 작품이 지어진 연도가 첨언 되어있다.
2) 변은진, 『일제전시파시즘기(1937~45) 조선민중의 ‘불온낙서’ 연구』, ‘한국문화’ 55호(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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