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지났다고 아름다운 기억은 없다

일러스트=토끼풀

 
 ‘유종의 미’라는 말을 싫어한다. 정확히 말하면 ‘어떤 일 따위의 끝을 잘 마무리하는 성과’라는 관용구의 의미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그 말을 처음 들었던 당시의 기억을 싫어하는 것에 가깝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나이가 지긋하시던 담임 선생님은 학생들이 잘못을 하면 소위 ‘깜지’를 쓰게 했다. 욕을 하다가 지적을 받으면 ‘욕을 하지 않겠습니다’를 300번 쓰는 식이었다. a4 용지 서너 장을 빼곡한 문장으로 채우기 전까지 집에 돌아갈 수 없었기에, 깜지는 몸이 힘든 동시에 시간을 빼앗는 벌이었다.
 
  문제는 선생님의 지적이 섬세하지 않다는 데에 있었다. 선생님은 괴롭힘을 당하다 참지 못하고 저항한 학생에게도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겠습니다’ 같은 문장을 동일하게 쓰게 했다. 사건 앞뒤의 맥락을 들여다보지 않고, 보이지 않는 부분을 알려고 노력하지 않은 채 드러난 결과로만 모든 잘잘못을 판단했다.
 
  하지만 12살 학생들의 사회는 그렇게 평면적이지 않았다. 각자 다른 성격과 고민을 가진 40여 명이 함께 지내던 교실에서는 사건 하나하나에 상당히 복잡한 인과관계가 얽혀 있었다.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없어도 부당한 일을 당하면 눈치껏 알았다. 그중에서도 유독 사건의 맥락과 행위의 정당성을 강하게 성토하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12살의 나였다.

  상대방이 먼저 저의 신경을 건드리는 말을 했어요. 욕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놀림과 비아냥은 정당화될 수 있나요. 싸움이나 욕을 없애기 위해선 그 원인을 먼저 제거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나는 나름 조리 있게 자신의 주장을 펼쳤으나, 돌아온 것은 대화가 아니라 ‘말대꾸를 하지 않겠습니다’ 같은 문장을 300번 더 추가로 쓰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굴하지 않고 선생님의 지적에 불합리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있으면 매번 바락바락 대들었다. 그로 인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깜지를 300번이든 1000번이든 써서 냈다. 때로는 펼쳤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욕만 하지 않고 선생님의 신경을 긁기도 했다. 물론 그럴 때마다 나는 ‘버릇없이 행동하지 않겠습니다’를 300번씩 더 썼다. 그러면 모순적인 결과에 다시금 반감은 커져갔다.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을 돌려 말한 건지 모르지만, 선생님은 기회가 될 때마다 ‘유종의 미’에 대해 이야기했다. 너희들은 이제 6학년이다. 마음에 안 드는 것도 있겠지만 유종의 미를 거둬라. 졸업하고 지나서 보면 다 이해가 될 거다. 하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지금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시간이 지났다는 이유만으로 해결될 일 없다고 생각했다. 나에게 필요한 건 현재의 대화였지, 모든 게 마법처럼 이해되는 막연한 미래가 아니었다.
 
  험악해지기만 하던 나와 담임 선생님의 관계에서, 깜지는 묘한 균형을 맞추었다. 적어도 선생님은 깜지 외에 별다른 체벌이나 불이익을 주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는 자신이 쓰는 문장을 반성의 과정이 아니라, 일련의 비용으로 여겼다. 어쨌든 정해진 분량을 다 써내기만 하면 불만을 표출해도 괜찮았다. 나는 납득할 수 없는 부당함을 표현하기 위해 당하는 불이익을 기꺼이 반겼다.
 
  문제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일어났다. 어느 날 깜지를 쓰던 나에게 기막힌 생각 하나가 떠오른 것이다. 같은 횟수의 글자를 쓴다면, 그것을 작게 쓸수록 시간을 절약할 수 있지 않을까. 선생님과 부딪히며 매일같이 300번 이상의 문장을 쓰던 나에게 이건 시간과 노동을 절약하는 획기적인 아이디어처럼 보였다.
 
  나는 곧바로 이를 실행에 옮겼다. 연필대신 선이 얇은 샤프를 사용했고, 쓰다 보니 점점 요령이 생겨 최종적으로 a4 용지 절반에 300번의 문장을 모두 채워 넣었다. 빽빽하게 적힌 글자는 자세히 보지 않으면 문장이 아니라 바코드의 검은 선처럼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깜지를 본 선생님은 노발대발했다. 장난치는 거냐며 전부 다시 써오라고 했다. 나는 싫다고 했다. 정해진 대로 다 했다고, 여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잘못한 게 없기에 당연히 벌을 받을 이유도 없다고 했다. 그 말이 선생님의 무언가를 건드린 것 같았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고 했다. 평소보다 훨씬 거친 목소리였다.
 
  사건은 예상보다 커졌다. 선생님과 나는 말싸움을 이어가다, 결국 부모님까지 호출했다. 부모님이 학교에 오는 건 큰 문제를 저질렀을 때나 벌어지는 일이었다. 선생님은 이를 ‘매우 심각한 사안’으로 여긴다는 뜻이었지만, 나는 한 번도 나눈 적 없는 그만의 원칙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학교에 다녀온 어머니는 나를 나무라지 않았다. 오히려 어머니도 그게 왜 ‘심각한 사안’인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해주었다. 다만 선생님이 조금 깐깐해 보인다며, 아마 앞으로도 크게 변하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어머니의 말은 중요한 조언이었다. 그 뒤로 나는 선생님에게 대드는 일을 완전히 그만뒀다. 아무리 싸우고 요구해도 그는 변하지 않을 테니까. 시간을 들여 수천 번의 문장을 써도 내가 바뀌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진 나와 선생님에게 깜지는 편향되었을지언정 유일한 소통의 수단이었다. 그 수단이 무너지자 우리는 완벽하게 단절됐다. 나도 더 이상 불이익을 감당하며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지 않았다.
 
  내가 얌전해져서인지 선생님은 더 자주 유종의 미를 강조했다. 곧 졸업식이다. 안 맞는 부분도 있었지만 그것도 다 배움이 될 거다. 같이 유종의 미를 거두면 된다. 하지만 표현하는 것을 멈추었을 뿐, 나는 여전히 그의 말에 무엇 하나 동의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간다는 이유만으로, 이 시기가 끝난다는 이유만으로, 기억이 아름다울 수 있나. 그건 나뿐만 아니라 당신에게도 거짓말 같았다.
 

 
  나는 초등학교 졸업식에 가지 않았다. 졸업장과 앨범은 택배로 받았다. 누군가는 철없는 초등학생의 마지막 자존심쯤으로 여길지도 모른다. 그냥 담임 선생님과 덕담이나 주고받으며, 마지막 사진 한 장 찍고 어린시절의 추억으로 여기는 게 좋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었다. 선생님과 나는 서로에게 무엇도 이해시키지 못했다. 그 순간을 가꾸기 위한 어떠한 노력도 함께하지 않았다. 그러니 15년이 지난 지금도 그 시절은 전혀 아름답지 않다. 나는 그 사실을 기억하고 싶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도 기억과 관련된 이야기가 자주 들려온다. 정치권이나 연예계에서는 학교폭력 논란이 끊이질 않고, 많은 이들이 ‘이미 지난 일’임에도 불구하고 피해자의 아픔에 공감하며 가해자를 책망한다. 우리는 명확하지 않아도 이미 눈치껏 알고 있다. 기억이 현재와 완전히 분리될 수 없음을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여전히 ‘미래’를 담보삼아 기억을 끊어내기를 강요한다. 단원고의 기억교실을 재학생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철거하려던 시도가 그렇고, 이태원 합동 분향소를 ‘불법 시설물’로 규정하며 행정대집행을 예고한 서울시의 결정이 그렇다. 당사자를 배제한 채 자신만의 원칙을 내세우는 대통령의 위안부 강제동원 문제 해결책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요구는 한결같이 기억을 보존하고 돌아보는 대신, 모든 걸 ‘없던 일’로 덮을 수 있는 마법 같은 미래가 있다며 우리를 닦달한다.
 
  하지만 나는 동의할 수 없다. 기억을 끊어내고, 현재의 문제를 외면하며, 서로에 대한 이해마저 단절한 미래에 무엇 하나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시간이 지났다고 모든 게 납득이 되는 세상이라면 용서와 반성은 쓸모없는 것이 된다. 이를 위해 나눠야할 수많은 대화와 화해의 노력도 무의미해진다.
 
  어떠한 변화도 기대할 수 없는, 불이익을 감당하며 소통하려는 목소리마저 무참히 꺾어버리는 사회에서 자라날 아름다움은 없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보편적 가치가 무너진 자리에 떠도는 황폐함을, 시간이 지났다는 이유만으로 잊지 않을 것이다. 15년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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